2010년 3월 20일 토요일

멋진 신세계 줄여읽기

20세기의 포드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하여 대량생산의 신화를 이룩해내었다. 헨리 포드의 탄생을 기원으로 삼고 포드주의가 가져온 자동조립, 대량생산, 효율성의 기초아래 만들어진 멋진 신세계는 기술문명이 만들어낸 불안한 미래사회다. 소설의 배경은 A.F.(After Ford) 632년. 인간은 인공수정과 조작에 의해 탄생된다. 성장과정에서도 수면교육이라는 세뇌교육을 통해 사랑이란 감정도 필요 없고, 무엇에 대한 책임이나 윤리의식 또한 필요 없다. 계급이 결정되어 있기에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거나 탐구할 필요가 없고, 주어진 능력에 따라 주어진 길을 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듯이 죽음을 맞이하면 된다.

이 사회에서 임신과 출산은 엄격하게 법으로 금지되어있다. 모든 아기는 공장에서 계급별로 생산이 되는데, 최고의 계급인 알파 계급의 아기를 뺀 나머지 계급의 아기는 태아 때부터 자신의 계급에 맞게 조작이 된다. 만약에 광부로 태어나는 아기의 경우에는 평생을 땅 속의 깊은 갱도 안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눈이 좋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애초에 태아의 눈을 퇴화시켜버리는 것이다. 또한 이 광부의 일에 있어서 지적 능력은 사실상 방해가 되기 때문에 태아 상태일 때 산소의 공급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지능이 낮아진 후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는 표면적으로 공유, 균등, 안정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회의나 의심, 도전이나 좌절이 없기에 만들어진 동요 없는 ‘안정’상태일 뿐이다. 인간의 고유성을 짓밟아버린 기술문명의 폭력성에 대한 절규가 “아아! 이런 인간들이 사는 멋진 신세계여”라는 절규 속에 터질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이러한 신세계의 사람들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는 야만인 존의 눈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존은 12세 때 셰익스피어 전집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사랑, 질투, 분노, 죽음, 열정, 좌절이란 말로 표현되는 인간에게 내재된 신비로움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단결예배 시간에 문명인들은 소마를 성스러운 잔에 담아 자기 멸각을 위해 건배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자기를 잊어버린 신세계는 멋진 신세계가 아니라 조금도 멋질 수 없는 참혹한 세계인 것이다.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Brave new 1984.

조지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이 두 소설은 제목부터 미래사회에 대한 접근방법이 다르다.
조지오웰은 뭔가 chic한 느낌의 제목으로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미래사회를 표현했고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즉 화려한 형용사로 표현했다. 소설 속의 표현 역시 두 소설은 다르다. 조지오웰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침한 문체로 소설을 이끌어 나갔고, 헉슬리는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느낌으로 세계를 조명했다.(적어도 소설의 초반은.)
소설을 사회와 이렇게 비유해 보자. 북한은 1984를 따라가고 있다면 남한은 멋진 신세계를 따라가고 있다. 물론 다이렉트하게 서로를 대입한다면 말이 안된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에서의 계획성,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만하는 반사작용은 지금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다섯 등급으로 나뉘는 인간들.. 여기 남한에서 또한 고졸, 지방대, 수도권, 인서울, sky로 나뉘고 있지 않은가? 고려대학교를 자퇴한 한 학생의 용기가 떠오른다. 그는 똑같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듯한 모두가 비슷한 삶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 환경에 반기를 들었다. 비록 두 소설의 개혁자들은 실패로 돌아갔을지 몰라도 그는 보란듯이 성공하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기, 그의 개혁에 함께 동참할 자 없는가? ^^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미래 사회? 아니, 우리 사회

기본적으로 두 소설 모두 미래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고, 그 미래는 우리가 꿈꾸는 밝은 미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두 사회가 내걸은 반어적인 슬로건만 보아도 알 수 있음이다. 또한 언뜻 보면 굉장히 살기 좋아 보이는 두 사회의 커다란 문제점을 주인공들이 저마다 인식하고 저항하려하지만 그들의 의지와는 달리 씁쓸한 결과를 남기며 끝이 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1984년의 지배층인 당이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을 극한의 감시로 통제하는 반면, 멋진 신세계에서는 유전자 조작과 끊임없는 훈련과 교육으로 ‘뿌리부터 뽑아버리겠다’는 식의 철저한 방식을 쓴다.
멋진 신세계의 작가 헉슬리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왜 사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시키는 것을 그대로 하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그에 젖어들어 주체적인 생각은 하지 못한다. 다를 것 같은 우리네 사회도 이를 닮아가고 있다. 수동적인 자세로 남들이 하니깐 나도 하는 식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사회는 사람의 인간다운 모습은 거들떠 보려하지도 않고 그의 능력만을 중시한다. 능력에 따라 보이지 않는 계급이 형성되고 우리는 그것을 무던히 받아들인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무서운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멋진신세계 와 1984년

멋진 신세계와 1984년
1984년멋진 신세계는 사적인 감정을 금지하고, 계급사회 속에서 정보격차가 존재하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포드와 빅브라더와 같이 한 사람을 존경한다. 그리고 두 작품은 미래사회를 지옥으로 보고있다. 반면 멋진신세계는 육체적인 쾌락을 허락하지만 1984년은 모든 남녀행위를 금지하고있다. 1984년은 전체주의사상에 기반한 감시사회와 계급사회인 반면 멋진 신세계는 평등사상에 기반한 계급사회인 것이 차이점이다.
우선 두 작품을 보면서 정보통제면에서 볼 때 현재 중국과 구글회사 간의 분쟁이 떠올랐다. 그리고 1984년 처럼 극단적으로 정보를 통제하지않고 멋진 신세계처럼 정보를 조작한다던가 감시와 억압이 아닌 자유와 소마를 주는 사회 속, 즉 사탕을 주는 감옥에서 나는 과연 '존'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반 이상향적인 이 두 작품에서 미래에 정보통제나 조작, 그리고 반쾌락주의 같은 지옥같은 세계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작품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밝지만은 않은 미래

1984년과 멋진 신세계란 작품은 둘 다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 인간들이 기계들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그린 작품이다. 인간이 기계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은 비슷하지만 1984년은 반쾌락주의 이념에 따라 더욱 더 자신들의 쾌락은 중요시 여기지 못한 채 자신들의 당을 위한 행위만을 해야했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간들의 쾌락은 인정받는 사회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섹스를 들 수 있다. 1984년에서는 자신의 당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만 허용이 되었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간에게 섹스의 자유만큼은 주어졌다.
멋진 신세계란 작품이 인간의 쾌락에 대한 자유만큼은 인정해 주었다는 면에서 1984년에 지배체제보단 낫지만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씨들을 아기라는 완전체로 변하기도 전에 어른이 받기도 힘겨워보이는 훈련들을 하고, 알파,베타,감마 등으로 나뉘어 종족이 정해지면 각 종족에 따라서 하는 생활을 가르는 것 자체는 가혹한 일인 것 같다. 아무리 종족의 번영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신생아때 부터 기계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은 너무 비인륜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멋진 신세계' 멋지지 아니한가?

'1984'의 사회가 텔레스크린에 의한 감시와 극단적인 금욕주의,전쟁,빈곤 2분증오로 보여지는 증오기반의 독재사회라면 <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소마와 쾌락주의 로부터 주어지는 행복,안락함 들이 넘치고 질병과 죽음따위를 걱정할 필요도없는 오히려 불행할 자유가 없는 사회이다.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1984', '멋진 신세계' 이 두 작품 모두 과학의 발달과 전체주의, 인간성 상실 이라는 것이 결합 됫을때 발생될 수 있는 비극적인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현대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비관적인 관점의 소설들이다.하지만 나는 이 두 소설을 읽으면서 '1984'년의 런던은 지옥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멋진 신세계'의 런던은 오히려 약간의 매력을 느꼈다. 극단적으로 묘사된(96쌍둥이,소마 등)부분을 제외 한다면 이 작품의 세계는 정말로 멋지지 않을까? 이 사회에서는 자신의 일에 만족할수 있고 행복하다. 자고로 모든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추구이다. 그렇다면 그 방법이 설사 자유와 감정을 억압 하는 것이라 해도 만약 그것을 통해 정말 행복해질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조에족'이 울리는 클락션!

인간의 자유와 감정을 조작하고 억압하려는 전체주의 사상과 인간을 획일화 시키려는 도구로 전락해 버린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여실히 드러낸다는 면에서 두 소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흡사하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성욕구와 쾌락을 철저하게 짓밟고 통제하려는 <1984>와는 달리, <멋진 신세계>에서는 ‘소마’를 주입시켜 쾌락과 난교에 집착하게 함으로써, 계급화 된 사회에서 탈피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 인간을 양성한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과학문명에 의해 역으로 조정당하고 있는 역설적인 모습은 현재 우리사회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행복함을 좇아 과학기술과 획일화된 지식에 집착해왔던 우리 삶은 너무나도 피폐해져있다. 다큐 <아마존의 눈물>에 나왔던 비문명 부족인 '조에족'을 보며 우리가 쓴웃음을 짓게 된 것도 어쩌면 그들의 모습이 우리가 갈망하던 ‘행복’에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도한 과학 문명으로 인한 비극적 모습을 담은 두 소설은 역주행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울리는 클락션 일지도 모른다.

오오! 멋진 신세계여!

[1984]에서는 감시하고, [멋진 신세계]에서는 조작한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서로의 유토피아, 즉 ‘당’ 과 ‘만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자행되는 디스토피아의 어두운 모습을 나타낸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이 두 사회에선 기회가 없다. 태어나는 즉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철저한 계급사회다. 아니 한 곳에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모든게 결정된다. 그리고 이 두 사회는 역사종교라는 것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말살한다. 서로의 유토피아가 정당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과거마음의 기댈 곳을 없애버린다.
나는 이러한 유토피아, 곧 디스토피아가 멀지 않은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든다. 통신 수단, CCTV를 통한 감시, 완성되어가는 유전자 조작. 우리의 편리함과 삶의 안락함을 위해 발전되어 왔지만,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한다. 나의 이상으론 헤름홀츠의 항거를 지지한다. 그러나 이상일 뿐 현실에 부닺히면 그렇지 못하다. 현실의 나는 문명을 향유하는 포스터와 다를 바 없다. 각종 문명의 혜택의 편안함에 몸을 맡기는 머리는 헤름홀츠, 몸은 포스터가 되어간다. 머리로는 문명의 이기를 비판하지만 몸은 문명의 혜택에 감사해하며 즐긴다. 이것이 거의 모든 이 세상의 알파,베타 계급이 아닐까 싶다.

1984 vs 멋진 신세계

먼저 1984년과 멋진 신세계의 공통점은 인간으로써의 기본적인 권리인 '자유'가 억압되어 있다. 1984년의 경우 당의 감시와 사람들 사이의 감시로 인해 그들은 자유롭지 못하고 멋진 신세계는 보다나아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진 틀에 맞게 살아가고 심지어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두 소설의 차이점을 보자면 사랑의 관점이다. 1984년에서의 사랑과 섹스는 단순히 당의 일원을 만드는 용도로 쓰이지만, 멋진 신세계의 경우에는 그것조차도 역겹고 추잡하여 인공 수정으로 사람을 만들어 낸다. 또한 성적으로 문란하게 그지없다.
1984년과 멋진 신세계는 둘다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잇어 지금 현실에 살아가는 나와는 걸맞지 않지만 우리의 미래는 1984년보다는 멋진 신세계와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지극히 청결하고 소마와 같은 일종의 환각제에 쩌들어 사는 그런 미래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을 마치 대량생산하는 그런 미래는 보고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저 공장에서 찍어낸 기계와 같아서 사람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

조지오웰의<1984>과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의 공통점은 감정표출을 억제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표출의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1984>에서는 골드스타인에게 분노를 하는 '2분 증오'를 통해서만 불만표출을 하게 하는 반면, <멋진신세계>에서는 '소마'의 복용으로 분노 같은 감정을 억제하고, 쾌락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성행위에 관한 차이가 있다. <1984>에서 성행위가 절대 금지되어지지만 <멋진신세계>에서 성행위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세뇌되어 거부감이 없다.
<1984>와 <멋진신세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본능은 절대 완전히 변할 수 없다는 점이다. <1984>에서 윈스턴과 <멋진 신세계>에서 버나드가 그러하다. 그 어떤 감시와 유전적 변형, 세뇌가 있더라도 인간의 본성을 억제 시킬 수 없다. 하지만 두 주인공 모두 그 사회체제에 굴복(사형, 존의자살)하고만다는 사실에서 비극적 결말을 볼 수 있다. 이 비극적 결말에서 우리가 앞으로 과학적 기술의 발전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암시를 해준다.

'사랑'이 없는 미래사회

1984와 멋진신세계는 미래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공통적인 부분에서 이끌어내고 있다. 두 작품 모두 개인에게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결여시키는데 그 방식은 조금 다르다. 1984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억제시키고 그 욕구는 증오로 발산하게 만든다. 남녀간의 섹스조차도 오직 부부가 당을 위한 후손을 낳기 위해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멋진신세계에서는 원한다면 누구와 언제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행위속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사회를 그린 두 작품은 미래사회의 기술적 발전 측면도 잘 그려내고 있지만 무엇보다 소수의 기득권층이 사회에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자 감정인 '사랑'을 통제시킨다는 것이 눈에 띈다. 오늘날 사회에서 사랑없는,오직 성적 욕망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 그리고 점차 파편화되는 가정, 가족의 모습들은 두 미래사회가 극단적인 상상만이 아닌 마지막 경고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과학보다 중요한 이성과 감정의 사회.

1984년과 멋진 신세계는 둘 다 계급주의 사회이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는 전체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또한 사회의 안정을 추구한다. 그런데 1984년에서는 텔레스크린과 사상경찰등을 이용해 개인을 끊임없이 감시, 통제하고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급을 나누고 철저한 계급주의를 주입시켜 그러한 감시조차 필요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사회안정 시키는 방법이 조금 다르다. 그리고 1984년에서는 사랑과 쾌락까지 철저히 금지시키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국가가 권장할 정도로 사랑과 쾌락에 대해선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막연히 미래 사회의 모습을 지금보다 훨씬 더 생활이 윤택하고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984년이나 멋진 신세계에서 표현되는 미래사회의 모습은 ‘불행’했다. 자유도 없이 평생을 감시받는 삶이나 태어나기 전부터 운명이 정해져 기계 같은 삶을 사는 모습. 과학의 발달을 맹신하기 전에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명력있는 여러 감정들을 보듬어 살펴본다면 불행한 미래의 도래는 막을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정신병원

조지 오웰의 <1984>의 오세아니아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서 그리는 세계는 획일화되고 분업화된 계층사회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오세아니아와 달리 증오와 감시에 기반을 둬 사회를 유지하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는 유전자 조작과 극도의 쾌락을 통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회다. 이 사회는 무서운 사상경찰이나 폭력 대신 소마라는 한 줌의 쾌락을 통해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모든 종류의 괴로움을 없애준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 문명의 발달이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미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멋진 신세계>의 세계는 모두가 행복해야만 하는 세계, 즉 "불행해질 권리"가 없는 세
를 추구하고 있다. 또 유전자 조작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모두의 욕구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이 세계는 인간의 정신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고치려는 점에서 정신병원과 같다. 이 세계의 성원들은 아기와 같은 수준의 만족감만을 추구하고, 고도의 정신활동을 누릴 능력과 자유가 결핍되었다. 야만인 보호구역을 둘러싼 철책은 사실 문명국을 가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로 돌아보는 현대사회

‘1984년’과 ‘멋진 신세계’는 둘 다 철저하게 정해진 계급사회에, 변화를 꺼리고 안정만을 추구하려는 사회적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는 방식에서 두 소설은 차이를 보이는데, ‘1984년’이 국가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개인의 사상과 감정을 억압하여 공포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있다면 ‘멋진 신세계’는 인공부화를 통해 인위적으로 계급을 나누고, ‘조건반사적 훈련’과 ‘소마’를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변화의 필요성을 망각하도록 하고 있다.
‘1984년’의 ‘텔레스크린’과 ‘멋진 신세계’의 ‘보카노프스키법’은 현대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생활 감시와 유전자 조작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변화와 개인적인 감정을 존중해주는 현 사회도 미래에는 안정을 고수하고 기득권자들의 안위를 위한 체제를 만들어가지 않을지 염려가 된다. 두 소설에서 전체적인 안정을 위한 소수의 희생과 쇠퇴하는 과학과 예술, 무지해져가는 대중들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성을 기반에둔 미래사회


1984년과 멋진 신세계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각각의 계급이 있어서 하는 일이 다르고, 각 개인이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전체주의 사상이 바로 공통점이다. 하지만 이 두 소설에는 뚜렷이 보이는 차이점들이 있다. 1984년은 감정을 억제하는 반 쾌락주의적인 사회인 반면, 멋진 신세계는 감정을 추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쾌락주의 사회이다. 또한 1984년은 “2분간 증오”라는 프로그램에 의한 증오에 기반을 둔 사회인 반면, 멋진 신세계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회이다.
이 두 소설에 나오는 미래사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암울하고 비극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사회는 이 소설에 나오는 것보다는 밝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두 소설에는 인간의 이성적인 면 에서는 간과하고 있거나, 이성적인 면이 있더라 하더라도 사회구조적인 시스템에 의하여 좌절된다고 본다. 하지만 미래의 우리 사회에는 인간의 이성적인 면을 기반을 두어 사회체계가 이루어질 것이고, 과학이나 기술적 측면은 인간의 이성적인 면을 보조하는 역할 만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막연한 유토피아를 바라지말라

1984멋진신세계는 미래사회가 인공수정,계급화,우상화(빅브라더/포드),전체주의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사회구조를 나타냈고 소설의 비극적 결말이 미래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관성을 드러내지만 사회구조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의 반쾌락주의와 후자의 쾌락주의 사회라 말할 수 있다. 또한 모순을 나타내는 점에서 전자는 당원들의 반쾌락주의 후자는 보카노프스법의 신봉자인 인공부화연구소 소장의 과거로 두사회의 모순을 나타낸다.

두 사회를 미술적으로 비유하자면 같은 양식으로 그려낸 미술작품이라 보고 싶다. 르네상스 미술이 르네상스시기를 대변하고 예술성을 부흥 시켰듯 두 소설은 반유토피아적 미래사회를 대표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태어난 화가라 하여 똑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듯 유사한 시대적 상황을 겪은 두 작가는 회의적으로 미래사회를 바라보지만 각자의 소설은 작가 자신만의 강조와 풍자가 느껴진다. 두 작가는 막연한 유토피아 세상이 도래하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미래사회의 대한 인식을 더욱 넓히도록 하는 서로의 그림을 그려냈다 말하고 싶다.

사랑과 증오

<1984년>과 <멋진신세계>에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환경에서 살고있다. <1984년>에는 아이를 자신이 낳을 수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를 부모님들도 있다. 하지만 <멋진신세계>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른다면 비웃음을 당한다. 그 예로 토마킨의 경우가 있다. 그리고,<1984년>에는 증오라는 고리안에서 사람을 감시하고, <멋진신세계>에서는 사랑이라는 고리안에서 사람을 감시한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소마'라는 술과 비슷한 약을 먹음으로써 행복해진다는 말을 듣고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볼수록 <멋진신세계>의 사람들은 마약쟁이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이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언제든 약에 의존한다는 것이 마약쟁이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과학에 자꾸 의존한다면,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무지해지고 '소마'와 비슷한 것들이 생길 것 같다.

자유를 위한 반항

1984년과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반항을 한다.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에게 더욱 유익한 삶을 제공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그 세계와 체계에 불만을 갖는다. 반면 1984년과 멋진 신세계는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랑의 자유가 인정된다. 만인은 만인의 것이라는 이념아래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또 다른 차이점은 이들의 탄생이다. 1984년은 남녀의 관계에서 아이가 탄생하지만 멋진 신세계는 난자에서 싹을 틔우고 배양하여 아이가 탄생한다. 그로 인해 여자들은 아이를 낳지 않게 되고 부모라는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
이 두 책을 읽고 과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효율성을 중요시 한다면 그 두 세계의 체제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의 의지와 권리를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과학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것 같다. 현재 2010년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겐 미래에 대한 비극적인 시각을 갖게 만들었지만 한편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상기시킨다.

개성이 결여된 미래사회

'1984년'과 '멋진 신세계'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삶의 방식을 바꿈으로서 자신만의 개성이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미래사회의 사람들 모두 다 똑같은 생활을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1984년’은 현대사회에서 쉽게 결혼이나 이혼을 하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순결을 중요시 여기는 반면 ‘멋진 신세계’는 순결보다는 자신의 욕구를 중요시한다.‘1984년’은 감시체제로 인해 사상에 대해 저항하는 사람들을 축출하지만 ‘멋진 신세계’는 병 속의 태아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상을 세뇌시킨다. 나는 작품들을 읽으면서 현대사회에도 많이 결여된 ‘개성’이 미래에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현대사회는 점점 자신의 개성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아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능력에 맞게 생활하면서 계층사회가 점점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 작품들 또한 자신의 개성 없이 계급에 맞추어 생활하는 걸 보면서 이런 모습이 몇 년 뒤 우리사회의 모습은 아닐까라는 걱정이 든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1984년>과 <멋진신세계>의 두 미래 모두 철저한 과학의 지배를 받으며 고도로 통제되고 있는 시대라는건 같다. 하지만, 1984년은 증오로, 멋진신세계는 행복으로 사회를 지배했다.(그렇지만 두 미래 모두 '사랑'은 느끼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1948년은 텔레스크린이라는 도구를 통해 철저히 감시했지만, 멋진신세계는 (태어날때부터 생각조차 유전자조작을 했으므로,) 그정도의 감시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미래 모두 철저히 지도자의 숭배를 중요시하고, 두 미래의 사람들이 아는 과거는 지배자에게 통제된 이야기이다.
사실 <멋진신세계>의 경우,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마'같은 것을 먹으며 고독이나 슬픔따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이란, 행복할 것같다는.. ('존'이 멋진신세계인 런던에 환상을 가졌던 것처럼..) 하지만 버나드 처럼 유전자조작의 오류로 '고독을 아는' 사람이나, '존'처럼 통제되지 않은 사회밖에서 길러진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역시 그런 세계란, 끔찍하다. 그것이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삶이며, 소마를 먹고 말초신경을 자극해서 얻는 행복이란것이 진정한 행복일지 의문이 든다.


하나도 안 멋진 '멋진 신세계'

<1984년>과 <멋진 신세계> 모두 '인간은 인간의 본성 파괴에 대항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면서 어두운 미래의 단면을 통해 현대 사회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으로 반유토피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사회의 '안정'을 위해 국가가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으냐에는 차이가 있다. <1984년>을 과학문명의 발전을 테러와 감시에 이용한 증오 기반의 사회라고 한다면 <멋진 신세계>는 행복(만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는 <멋진 신세계>와 더 닮아있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 문명의 혜택을 얼마나 많이 누리고 있는가. 두 소설에서는 아예 순응하거나 혹은 아예 포기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윈스턴'이나 '존'과 같이 양극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어중간한 최후는 아주 비극이다. 따라서 우리는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 자체로서의 의미'를 잃지 않을 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인간의 존엄성 VS 쾌락!!! and 성과주의...

[1984년]과 [멋진 신세계]두 작품 모두 사회체제와 과학기술에 의해 인간이 지배되는 모습을 그린다. 두 작품 모두에서 인간은 기계처럼 행동하도록 만들어져 있고, 그 것의 목적은 사회의 안정이며,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회체제가, "인간"의 가치보다 더 높게 매겨진다.
차이점이라면 [멋진신세계]에서는 과학기술이 더 많이 발달하였고, 인간의 "쾌락"이 보장된다는 점이다. 그 것은 얼핏보면 [1984년]보다 더 나은 세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쾌락"이외의 다른 가치를 보면 이 것은 [1984년]보다 더 나쁜 세상일 수 있다. 일단 멋진신세계에서는 태아의 수를 수십배로 불리고, 사회적 역할을 강제로 정함으로써 인간을 "기계화"시킨다. 또한 쾌락이라는 요소를 강제로 주입시킴으로써 인권의식을 없애버린다. 그렇지만 과연 인권이 쾌락보다 더 중요할까? 오로지 결과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존재의미를 생각하는사람이라면 "당연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유토피아는 다름아닌 자유가 있는곳.

<1984년>에서는‘청소년 반성 동맹’이 지향하는 바와 같이 순결이 중요시 되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성적 자유는 보장된다. <1984년>은 저항에 대한 처벌이 고문이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재판이 파티로 묘사될 정도로, 처벌이라고 볼 수 없는 처벌이 이루어진다.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통제자인 무스타파 몬드에 의하면 9년 전쟁을 겪은 이후에 사람들이 조용한 삶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좋다는 식이어서 사람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통제를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84년>에서는 전쟁의 목적이 순전히 당을 존속하게 만드는, 지배층의 사회 구조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것으로 피지배자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984년>은 디스토피아적 성격을 띠고, <멋진 신세계>가 유토피아적 성격을 띤다고 구분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두 사회 모두 정작 인간에게 꼭 필요한 가치인 ‘자유’가 빠져 있다는 점에서, 둘의 가장 큰 공통점을 디스토피아적 측면이라는 점으로 꼽겠다. 나는 아무리 행복과 안정된 생활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자유롭게 내 생각을 말할 수 없고 다 똑같이 이야기하고 생각해야하는 세상에서는 정말로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교육 방식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들과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교훈이 우리 사회에 자유라는 가치의 소중함을 한번 더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