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2일 금요일

수업 관련 영화 강추 Gattaca

<멋진 신세계>처럼 유전공학이 만들어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훌륭한 영화입니다.

두번째 과제입니다

아마도 지금쯤 여러분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즐겁게 읽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음 주 과제는 아래와 같습니다.

현대 사회에 대한 비평으로서 <1984년>과 <멋진 신세계>를 비교하십시오. 두 작품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학생 여러분 각자의 생각을 덧붙이기 바랍니다. 길이는 10줄 정도이고, 내용 비교 5줄, 자기 생각 5줄로 작성하기 바랍니다.  마감은 월요일(3월 15일) 밤 12시까지입니다. 이번 과제부터는 요건(길이, 내용, 마감시간)을 충실히 갖추어 올려야 합니다. 엄격하게 평가할 것입니다.

Amuzing Ourselves to Death 죽도록 즐긴다


닐 포스트맨: <죽도록 즐긴다>

민주적 정보 격차

정보기술이 공동체적 참여나 정치참여와 같은 시민참여(civic engagement)를 확대하는가 아니면 기존의 불평등한 참여를 강화하는가하는 문제.

참여 가설: 인터넷이 정치참여를 확대 혹은 강화시키는가?
디지털 원주민 가설: 디지털 이민자들이 아날로그 액센트(억양)를 극복하지 못하는가?
분절화 가설(사이버 발카니제이션): 호모필로스 커뮤니케이션 - 공동체를 약화시키는가?
오프라인 시민참여 대체 가설: 시민들이 온라인 활동을 선호해 오프라인 활동이 약화되는가?
시민권력 강화(empowerment of citizens) 가설

사회적 정보격차

한 사회 내 의사소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보격차
1. 정보생산 단계
- 공공정보의 빈곤
- 정보의 지나친 상업화
- 심층웹(deep Web) 혹은 보이지 않은 웹(invisible Web): 표준적인 검색엔진에 의해 인덱스 되지 못하는 웹상의 정보

2. 정보전송 단계
- 호모필로스 커뮤니케이션(homophilous communication): 커뮤니케이션의 폐쇄성은 해소되고 있는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에 따른 정보 격차. 이 관점에서 최근의 사회적 미디어(twitter, facebook 등)를 생각해 보자.
- 정보기술 접근의 불평등: 구매력에 따른 불평등 접근, 지역적 차이, PC, 스마트폰, e-Book
- 보편적 접근(Universal Access): 전화에 적용되던 개념, 여전히 유효한가?
- 특정 상업적 소프트웨어에 편향적인 인터넷 환경
우리나라는 아직도 MS Windows의 천국. MS Windows vs. Linux
상업적 소프트웨어(MS windows, IE, 크롬) vs. 공개소프트웨어(Open Source Software: Linux, Firefox, Wordpress)
Active X의 문제: IE 이외 웹브라우저 사용을 어렵게 만듦


3. 정보수용 단계
- 수용자 개인적 수준에서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혹은 교육수준에 따른 수용 정보의 차이

Web 2.0: 개방, 공유, 참여: 이 정신은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가?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s) 대 디지털 이민자(digital immigrants)

Global Digital Divide

지금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정보 격차(불평등)는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지구적 정보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UN총회가 승인한 '정보사회에 관한 세계정상회의(WSIS)'가 2001년, 2005년, 2009년에 개최되었습니다. 다음 링크는 2005년에 튀니스에서 열린 WSIS에서 발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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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는 지구적 정보격차

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정보부자 와 정보빈자

Pippa Norris 교수, Havard 대학교, John F. Kennedy School of Government

그녀(, 2001: 우리말 번역 <디지털 시대의 민주주의>)는 정보격차(digital divide)를 지구적 격차(global divide), 사회적 격차(social divide), 민주적 격차(democratic divide)의 차원으로 개념화시켰다. 노리스 교수는 인터넷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매우 조심스럽다. 기존의 사회구조가 지닌 관성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인터넷이 획기적인 사회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디지털 문화에서 자라난 세대가 사회의 중심이 되는 시대가 되면 의미 있는 사회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Going to Extremes 극단으로 간다

Cass Sunstein (Harvard  법과대학원 교수). 2009. Oxford University Press.
유유상종(Like minds unite and divide) --> 집단 극화(Group Poarization)

Sunstein (2007)에게 사이버발칸화는 Van Alstyne and Brynjolfsson과 달리 여러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들 중 하나가 아니라 온라인 공동체의 강력한 트렌드이다. 많은 사람들은 더욱 크고 다양한 공동체들을 구축하기 위해 인터넷을 사용하기도 하겠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유사한 관심과 견해를 가진 사람들끼리의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인터넷을 사용한다. 그런데 Sunstein은 후자가 더 지배적인 경향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서처럼 정보가 넘치고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마음대로 선별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이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는 세계관과 충돌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은 자연스런 경향이기 때문이다(Sunstein, 2007: Loc. 541-50).


그는 인터넷이 지닌 고도의 선별(filtering) 기능은 ‘일간 나(Daily Me)’로 상징되는 매체의 개인화 혹은 전문화를 초래하고 그것은 민주주의와 공동체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예견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주제와 견해에 대한 노출을 줄이고, 풍부한 정보가 제공된 숙의(deliberation)를 어렵게 만들어 민주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다. 또한 미국과 같은 이질적(heterogeneous) 사회에 있어 구성원들의 공유된 경험(shared experiences)을 줄어들게 만들어 심각한 분절화의 위기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Sunstein, 2007: Loc. 405-13).

Sunstein의 우려는 특히 지역사회 공동체 혹은 민족공동체와 관련한 문제제기이다. 오프라인 공동체의 경우 공공장소에서 다양한 관심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우연히 마주치고 대화할 가능성이 있으며, 신문이나 TV과 같은 ‘일반적 관심 매체(general-interest intermediaries)’의 뉴스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견해의 기사를 대할 수 있어 자신과 관심과 입장이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을 인지하고, 공동체 의식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공간에서는 자신의 관심과 관점이 다른 컨텐츠는 미리 배제해버리고 자신의 관심에 맞고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 컨텐츠만을 선별해 접하기 때문에 사이버공간에는 ‘반향실(echo-chambers)’이 넘쳐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Sunstein이 인터넷으로 인해 시민참여가 감소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동질적 공동체들이 많아지면 오히려 사회가 정치적으로 더 역동적이 된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할 때 사람들은 더욱 활기차게 되고 집합행동을 도모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Sunstein, 2009).

프라이버시 보호에 관한 글

개인정보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보호를 위한 정책 연구

국가인권위원회 2004년도 연구용역사업의 최종보고서를 제출합니다

2004. 9

연구책임자

윤영민(한양대학교 정보사회학과 교수)

연구자
김현석(한양대학교 연구교수)
고동현(연세대 강사)
최 홍(한양대학교 대학원)
류자현(한양대학교 대학원)

한 양 대 학 교


1. 서 론: 네트워크사회와 프라이버시

1) 사회적 쟁점으로서의 프라이버시

우리나라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정보 혹은 프라이버시 보호만큼 새로운 사회적 쟁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도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낯선 쟁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라이버시 침해가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 왜 프라이버시를 다른 사회적 가치를 포기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개인정보 혹은 프라이버시 보호에 대해서는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할 것이다’라는 식의 미래가정법으로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고, 최근에야 겨우 몇몇 구체적인 피해 사례들을 가지고 논쟁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공공부문에서는 아직도 개인정보보호가 예방적 성격의 입법이나 정책이다. 민간부문과 달리 개인정보의 유출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생활 혹은 이름도 낯선 프라이버시가 자유, 민주, 정의만큼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가치라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우리사회는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강조하는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대화를 통해 개인주의가 충분히 개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라이버시에 대한 주장들은 이념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지 못했다. 아직 어떤 이론가도 그것이 목숨을 바칠 만큼 중요한 가치임을 입증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이나 운동가들이 그것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을 뿐 큰 사회적 반향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이유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제약이 늘 시민들이나 소비자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보상과 함께 제시된다는 점이다. 국가안보, 생명과 재산의 안전, 효율성, 국가경쟁력, 편의성 등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가치가 프라이버시의 제약에 대한 보상으로 거론된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선택은 항상 혼란스럽다.

이 때문에 프라이버시에 관한 입법이나 정책 추진에 있어 강력한 사회적 지지나 정치적 동력을 끌어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정보 혹은 프라이버시 보호에 관해 시급히 국가적 입장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당분간 프라이버시는 갈수록 뜨거운 사회적 쟁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전자주민카드, 전자건강보험증, NEIS 등 정보화 국책사업을 둘러싸고 우리사회는 적지 않은 혼란을 경험하였으며, 그에 따른 거액의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였다.

정부는 유비퀴터스 컴퓨팅을 우리 경제의 차세대 성장엔진 중 하나로 선택하여 적극적으로 관련 사업들을 추진하고자 한다. 그런데, 스마트카드, 무선 인터넷, LBS, RFID, IP v.6 등 유비퀴터스 컴퓨팅에 적용되는 정보기술 중 어느 하나 프라이버시 문제를 내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전자정부사업도 계속 프라이버시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현 단계에서 전자정부사업들은 거의 모두 부처간 정보공유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국민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보화는 심각한 장벽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2) 프라이버시의 역사성

한 사회에 있어 프라이버시 개념은 대체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다.

19세기말 명사들의 스캔들 보도에 경쟁적이었던 황색저널리즘은 ‘홀로 있을 권리’라는 고전적 의미의 프라이버시 개념을 등장시켰다. 대중매체의 보도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사적 영역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탄생한 것이다.

근대적 우편제도가 시작된 19세기 중엽부터 통신의 비밀이 법적 권리로 등장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전화가 널리 보급되고 도·감청이 증가하면서 프라이버시 개념은 통신의 비밀까지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그러나, 대중매체나 전화까지만 해도 아직 프라이버시는 유명한 정치인, 연예인, 혹은 운동선수가 아닌 보통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권리로 인식되지 않았다.

컴퓨터가 통신에 널리 활용되고 대규모의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원격접속이 가능해짐에 따라 개인정보의 보호가 프라이버시 개념에 추가되었으며, 비로소 프라이버시는 대중적 관심사로 발전하였다.

디지털 정보기술에 의존한 대규모 데이터베이스의 등장은 개인정보의 가치를 높여주었다. 사실 보통사람의 개인정보는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 교환가치가 거의 없으며, 데이터베이스에 집적되었을 때 비로소 상업적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첫째, 개인정보는 대량으로 처리되는 정보의 일부가 되었을 때 가치를 갖는다. 예컨대 정크메일을 발송하는데 사용되려면 많은 사람들의 주소가 담긴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며, 개인주소는 그 데이터베이스의 일부가 되었을 때 상업적 가치를 갖게 된다.

둘째, 행정이나 금융 업무가 데이터베이스로 관리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 은행구좌번호, 신용카드번호 등과 같은 개인정보의 유출이 정보주체에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만약 행정이나 금융 업무가 수작업으로 처리되고 민원서비스가 대면적(對面的)으로 수행된다면 주민등록번호나 은행구좌번호가 남에게 알려진다고 해도 정보주체에 피해가 돌아가 가능성은 아주 적을 것이다.

사실 보통사람들에게 있어 프라이버시는 정보사회에 진입하면서 비로소 관심사가 되었다. 정보화는 개인정보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개인정보 혹은 프라이버시 침해를 사회적 쟁점으로 끌어올렸다. 혹자는 정보화가 프라이버시 침해를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반쪽의 진실이다. 프라이버시 침해를 논하기 이전에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만한 가치로 격상시킨 것이 바로 정보화이기 때문이다.

정보화는 프라이버시를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확장시켰다. 최근에 프라이버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 프라이버시는 원하지 않은 접근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말한다. 이는 ‘홀로 있을 권리’라는 고전적 의미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신체나 공간에 대한 물리적 접근을 의미할 뿐 아니라 전자우편, 메시징, SMS 등과 같은 전자적 접근도 포함한다. 다시 말해 주민이나 소비자가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을 통한 타인의 접근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 프라이버시는 자신에 관한 정보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용되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본인의 동의 없이 혹은 법적 근거 없이 개인정보가 수집, 보유, 매매, 이전, 노출, 매칭 등이 되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셋째, 프라이버시는 자신이 정확하고 올바르게 표현될 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데이터베이스의 소유자나 관리자는 그곳에 담긴 개인정보의 무결성(integrity)을 유지해야할 의무가 있으며, 정보주체는 데이터베이스에 들어있는 자신의 정보를 열람하고 정정하거나 정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넷째, 프라이버시는 자신의 정보가 지닌 가치에 대해 보상받을 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상업적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할 때는 각 정보주체에게 어떤 형태로든 적절히 보상해야 함을 가리킨다.

다섯째, 보다 포괄적 관점에서 프라이버시는 정보주체의 자기정보 통제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프라이버시는 개인정보의 수집에서부터 보관, 관리, 이용, 이전, 그리고 폐기에 이르기까지 개인에 관한 정보가 사회적으로 활용되는 모든 과정과 방식에 관해 개인정보에 관한 정보주체의 권리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라는 의미로 확대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프라이버시가 개인이 자신의 어떤 정보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수집되고, 어떻게 보관되며, 어떻게 이용되는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적 변화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경향은 프라이버시 보호에 관한 담론에서 정보주체라는 존재가 확실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정보주체가 정보소유자로부터 구분되고 정보주체의 권리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데이터베이스가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정보소유자와 정보주체의 구분이 사실상 불필요했다. 개인정보의 오ㆍ남용이란 연예인이나 정치인과 같은 사회적 저명인사의 사생활 폭로가 대부분이었고 따라서 그 피해도 대체로 그들에게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일반대중의 개인정보를 담고 있고 그것의 상업적 활용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정보주체를 정부, 기업, 혹은 단체 등 데이터베이스 소유자로부터 구분해서 그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어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보기술의 발달이 가져오는 프라이버시의 개념적 변화가 여기서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정보화가 궁극적으로 프라이버시가 전제하는 개인(individual)에 대한 관념 자체를 바꿀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서양문명에서 개인에 대한 관념 혹은 개인주의는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 시대에 최초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근대성(modernity)의 핵심적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자신이 자신의 행동과 삶, 나아가 운명에 대해 성찰하고 책임져야하는 존재라는 인식, 사회 속에서 살아가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혼자이며 고독한 존재라는 인식, 인간은 사물과 현상을 객관적 가치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존재라는 인식, 그리고 나(Self)와 타자(Others) 사이의 분명한 구분은 근대성을 이전의 문명과 구분 짓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은 근대의 산물이다.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개인은 가족, 부족, 혹은 지역사회와 같은 전통적 공동체의 일부로서만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며, 개인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아니라 그 개인의 재능, 성격, 행동, 그리고 업적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 된 것이다.

정보화로 인한 개인정보의 가치 증식은 이러한 근대적 개인의 문화와 만남으로서 프라이버시 문제로 부상된다. 만약 정보화로 인해 근대적 개인이 어떤 다른 존재나 존재인식에 의해 대체된다면 프라이버시는 개념적으로 어떻게 변화될까?

이러한 인식변화를 요구하는 기술적 발전이나 조직적 변화가 이미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데 프라이버시에 대한 논의, 나아가 프라이버시에 대한 입법과 정책 수립의 진정한 어려움이 있다.

여러 연구가 지적했듯이 최근까지 인터넷 확산은 개인화(individualization) 혹은 개인주의를 촉진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인터넷으로 인해 개인 자체와 개인이 지닌 가치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역량이 크게 강화되었다. 인터넷은 개인이 더 이상 전통적인 사회적 굴레에 억매일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사이버공간에서 개인은 자신의 선호와 기호에 따라 수없이 많은 가상공동체에 가입해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사이버공간은 극도로 세분화되어 사람들은 아주 미세한 관심사, 취미, 기호 등으로 형성된 가상공동체에서 기능적 욕구를 충족한다. 이렇게 해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했던 기존의 사회적 범주들(예: 성별, 인종, 계층)이 힘을 잃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떤 학자들은 정보화가 개인의 승리 그리고 근대의 완성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반전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최근에는 컴퓨터 네트워크의 발달이 그와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역사를 구동시킬 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등장하고 있다.

Douglas Rushkoff(2004)는 인터넷이나 이동전화를 통해 항상 네트워크에 접속되어 있게 되면 더 이상 개인은 자신의 축적된 능력과 업적의 총합이 아닐 것이라고 예상한다. 또한 그는 물건이든 돈이든 데이터든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가 큰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더 이상 희소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네트워크사회에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 네트워킹하고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는 네트워크사회에서 궁극적으로 개인성(individuality)이라는 생각 자체가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고 예상한다.

정보기술의 발전이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신경계와 컴퓨터네트워크가 직접 연결되는 사이보그(cyborg) 사회가 출현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공두뇌학자 Kevin Warwick(워릭, 2004)은 2050년경이면 모든 의사소통이 인간의 신경계가 직접 네트워크에 연결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따라서 말과 언어-따라서 전화도-가 불필요하게 될 것으로 예측한다. 그는 하나의 물리적 개체로서의 개인은 희미한 존재가 되고 대신에 네트워크 상에서 집단적 개인이나 새로운 인격체가 출현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러한 상상을 먼 미래의 일이라고 치부할 것인가?

실제로 최근의 기술적 혹은 사회적 변화를 보면 이미 우리는 그러한 네트워크사회에 깊숙이 진입해 있으며 개인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동전화의 발달, 무선통신기술과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 그리고 그러한 기술발달에 힘입은 사회조직의 변형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전자정부는 전통적인 의미의 부서(혹은 부처)간의 경계를 넘어선 ‘정보의 공유’를 요구하고 있으며, 통상적 의미의 기업간 경계를 넘어선 네트워크기업(혹은 가상기업)이 출현하여 민간영역에서도 ‘정보의 공유’가 ‘정보의 소유’ 문화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는 프라이버시 영역에서 문화지체(cultural lag) 현상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라이버시에 관한 한 유엔인권헌장 정도로 간주되는 프라이버시에 관한 OECD 가이드라인은 25년 전 정보사회의 초입에 제시된 구상이다. 1980년 이후에 일어난 엄청난 기술적 그리고 사회적 변화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지닌 현실적합성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Waters, 2000).

그런데, 현실은 그 가이드라인을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있으며, 그것의 사회적 적합성을 따지는 논의는 거의 전무하다. 그것이 의사-이념적(擬似-理念的) 갈등 형태를 띠면서 논점이 수면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 낡은 가이드라인마저도 이제야 우리나라의 입법과 정책에 제대로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적어도 거기에 포함된 개념들이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프라이버시의 사회적 특성

대부분의 다른 권리도 그렇지만 프라이버시는 특히 다른 권리나 가치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프라이버시가 포괄적인 가치이면서 도구적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부터 프라이버시는 언론의 자유 혹은 독자들의 알권리와 충돌하였다. 명사들의 사생활 보호를 강조하면 기자와 언론에 주어지는 보도의 자유가 위축된다. 그래서 언론에 있어 프라이버시 보호는 보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였다.

프라이버시 보호는 국가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수사기관의 법집행을 위한 요구와 충돌하기도 한다. 9.11 사건이후 미국의 공항에서는 지문과 같은 생체인식시스템을 이용해 외국인의 출입국을 관리하고 탑승자 모두에게 대단히 엄격한 검색-다른 때 같았으면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고소를 당했을 정도로 엄격한 조사-를 받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유럽위원회와 유럽의회는 회원국들이 이동전화, SMS, 전화, 팩스, 전자우편, 채팅, 인터넷 등을 통해 발생하는 모든 통신자료의 보관을 의무화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테러리즘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한 조치라고 하지만 그것은 프라이버시를 위축시킬 수 있는 선택이었다(Laurant and PI, 2003).

또한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는 암호키의 위탁관리 문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수사기관들은 마약, 테러, 납치 등의 범죄를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수사하기 위해서 암호키의 위탁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프라이버시 보호를 우선시하는 학자와 전문가들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서는 국민들이 암호키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강제적인 키위탁은 어떤 경우에도 수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Waters, 2001).

지난 8월 지리산의 조난객이 신속하게 구조되지 못하여 생명을 잃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통신비밀보호법의 엄격한 운용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에 119(소방방재청)가 통신 사업자에게 이동전화 위치정보을 요청하였지만 통신비밀보호법을 근거로 협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정보통신부는 사전에 서비스 가입자의 동의가 있는 경우 119와 같은 긴급구조기관에게는 이동전화 위치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디지털타임스, 04/09/24).

이상에서 보듯이 프라이버시와 다른 가치와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한편으로 테러리스트로부터 국가안보는 물론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를 제한받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프라이버시가 철저히 보호되어야 개인의 생명과 재산이 보호될 수 있다. 신용카드번호, 위치정보, 유전자정보 등은 물론이고 주민등록번호나 이동전화번호도 개인의 생명이나 재산을 위협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프라이버시는 어느 경우에도 보호되어야할 절대적인 가치로 간주되지 않는다. 실제로 프라이버시는 다른 가치와 충돌할 경우 양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PLPR(Privacy Law and Policy Reporter)의 부편집자인 Nigel Waters(2000)는 개인적 수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라이버시에 대해 다소 정신분열증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대부분은 평소에 프라이버시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공중보건, 포르노그래피, 어린이 성추행, 납세사기 등과 같은 쟁점에 관해서는 프라이버시에 관한 평소의 입장을 쉽게 유보한다. 그래서 예컨대 청소년 성범죄자들에 대해서는 신상을 공개하는 사회적 처벌이 허용된다.

이렇듯이 프라이버시는 대단히 상황 의존적이기 때문에 프라이버시 보호는 정보주체의 개인적 선택과 결정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개인적 선택은 프라이버시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답이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선택’은 실현되지 않고, 실현되더라도 형식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개인정보는 관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고 또 다수의 사람들은 몇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개인정보관리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불법적으로 수집한 신용카드번호를 가지고 온라인 쇼핑을 하여 카드가입자에게 손해를 입힌 사건, 노숙자들의 개인정보를 도용해서 휴대폰 가입을 하고 그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만든 사건 등이 보여주듯이 프라이버시 침해는 누구에게나 심각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다수의 사람들은 개인정보를 관리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상에서 논의한 프라이버시의 사회적 성격으로 볼 때 결국 프라이버시 보호란 프라이버시와 서로 충돌하는 다른 공익(혹은 사익) 사이의 균형을 찾는 일이 될 것이다.


4) 바람직한 입법 및 정책 수립 방향

우리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이상의 검토로부터 다음과 같은 입법 및 정책수립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법안과 정책에는,

○ 무엇보다도 개인정보가 정보주체로서 개인의 소중한 자산임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할 가치라는 점이 반영되어야 한다.

○ 개인정보에 대한 궁극적인 권리가 정보주체에게 귀속됨이 반영되어야 한다.

○ 정보주체에게 풍부한 혜택이 돌아가는 한 정보공유를 적극 허용하되,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의 소유자인 기업이나 기관의 데이터베이스 관리가 정보주체의 권익에 반하지 않도록 적절한 규제가 포함되어야 한다.

프라이버시는 공공부문에서는 하나의 시민적 권리로서 이해될 수 있으나, 민간부문에서는 소비자의 권익(rights and interests)으로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국가는,

○ 공공부문의 경우 개인정보가 시민에 대한 국가기관의 감시(surveillance)와 억압에 이용되지 않도록 각 기관의 개인정보관리에 대한 감시(monitoring)와 규제를 철저히 시행한다. 그것은 정보주체, 곧 시민의 대표가 참여하는 민주적 절차여야 한다.

○ 민간부문의 경우 개인정보가 정보소유자에 의해 정보주체(대부분 소비자를 가리킨다)의 권익에 반하여 이용되지 않도록 기업이나 기관의 개인정보관리를 적절히 규제한다. 이에는 정부기관에 의한 규제 뿐 아니라 정보주체, 소비자단체, 사업자단체 등이 참여하는 자율규제도 포함된다.

○ 정보주체의 자기정보관리 능력을 높여주어야 한다. 즉, 정보주체의 자기정보결정권이 이념적 구호에 끝나지 않고 실제로 구현될 수 있는 PMS(Privacy Management System)와 같은 개념의 기술 개발을 적극 촉진해야 한다.

2084년...

1984년이후 사람들의 지식과 인식이 성장함에따라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등의 합리적으로 보이는 체제들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과학기술과 지적인식이 성장함과 달리 도덕성은 오히려 타락하고만다. 그래서 살인,강간등의 강력 범죄율은 증가하고 AIDS등 심각한 질병들의 감염자수도 증가하여 평균수명은 줄고 지구의 인구는 급감한다. 그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완벽한 사회체제와 절대적 안전을 바라게되고 2080년에 정치,경제,입법,사법 등 뿐만 아닌 본인들의 생활자체를 통제해주는 슈퍼컴퓨터를 만들고 그 틀(안전을 목적으로 여가활동,sex등은 생활의 포함 되어 있지 않다.)의 맞춰 살아간다. 사람들은 모두 틀에 박힌 생활을 하게되고 스스로 사고를 할 필요조차 없어지면서(스스로 사고 하고 행동을하면 슈퍼컴퓨터에 의한 제제를 받는다.) 2084년에 인간은 단순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기계와 다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라고 배경을 바꾸고 그에 따라 윈스턴은 당에대한 저항이 아닌 자기들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린 인간들에 대한 저항을 한다.

정보사회의 개인정보들

얼굴 없는 시선

얼굴 없는 시선 방송일: 2009-01-26 (04:36)
↑ 클릭하세요

사진이 올라온 것을 보고 도움이 될까 해서 EBS 지식채널e 에서 방송되었던 파놉티콘에 대한 영상을 링크합니다.

자유를 위한 속박에 대한 경고

<2084년>에서의 국제적 상황은...

인터넷의 인프라가 전 세계적으로 발달한다. 그래서 '지구촌'의 개념이 보다 물리적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국제기구인 UN의 영향력이 관례가 아닌 일반적인 법의 강제성을 띄게 되고 UN은 세계의 정부 역할을 하는데
1. 인간의 존엄과 자유 존중
2. 다양성 인정
3. 질서유지를 위한 국제법 준수
를 UN 3대 가치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만큼은 UN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고 세계통합에 따르지 않은 채 2010년의 북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인터넷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지만 발전한 기술을 역이용하여 더욱 더 체제유지를 위해 힘쓰고 있다.


주인공들은...

윈스턴은 UN에서 북한 실상을 알리는 기자로 일을 하게 되는데 있는데 여기서 줄리아와 만나게 된다. 줄리아 역시 북한 출신이기에 둘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사랑에 빠지는데 줄리아는 사실 북한의 간첩이다.
UN은 인간 존엄과 다양성 인정을 앞세워 윈스턴이나 줄리아같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있지만 질서유지를 위한 법 준수를 앞세워 동시에 감시하고 있다.
오브라이언은 UN의 안보국에서 일하는데 줄리아의 간첩활동을 알아채고 주시하고 있다. 줄리아는 결국 체포되는데 윈스턴 역시 불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윈스턴은 세계연합의 모순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된다.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원형감옥 Panopticon

Jeremy Bentham의 Original idea of Panopticon and Modern Panopticon

조지 오웰의 빗나간 예언

지난 6월 25일은 조지 오웰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1984년’에서 그는 고도로 감시적이고 전제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묘사하였다. 스탈린주의를 혐오했던 오웰이 그러한 작품을 저술했다는 사실은 크게 놀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마치 그가 정보통신기술에 의한 감시사회의 출현을 예상했던 것처럼 치켜세움은 적절치 않다.

‘1984년’을 오웰의 미래사회에 대한 예언이라고 간주한다면 그의 예언은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빗나갔다.

첫째, 현대 복지국가는 ‘1984년’에서와 달리 개인을 억압하기 위해서 사생활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감시한다. 가공의 나라 오세아니아에서는 강제적 억압을 통해 감시가 행해지지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의 동의와 초청에 의해 감시가 도입된다.

복지혜택을 받기 위해 개인의 재산과 수입, 직업, 병력 등은 국가에 기꺼이 제공되고, 안전을 위해 주택가 구석구석에 CCTV를 설치하는 것에 동의한다. 또한 여러 행정기관들이 각종 개인정보를 공동 이용하여 민원서비스를 개선하도록 요구한다.

물론 선의의 감시라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해킹에 의해 개인정보가 대량으로 유출될 수도 있고, D/B 관리자에 의해 개인정보가 오용되어 국민의 인권침해가 일어날 수도 있다.

둘째, 오웰은 ‘little sisters'의 출현을 예상하지 못했다. 오세아니아에서 감시자는 Big Brother에 의해 장악된 당(黨)과 국가이지만 오늘날은 기업과 개인-little sisters-도 국가에 못지않게 위협적인 감시자로 등장한다. 최근에는 Big Brother 보다 little sisters가 훨씬 위협적인 것 같다.

공장과 사무실에는 CCTV가 설치되고, 공장과 사무실 출입은 IC 신분증이나 생체인식을 이용해 통제된다. 신용카드사에는 개인의 구매정보가 쌓여 개인의 소비활동이 소상히 기록된다. 온라인 쇼핑몰은 회원의 인적 정보 뿐 아니라 사이트 이용 정보도 나날이 쌓여간다. 몰카(몰래 카메라)는 수많은 사람들을 본인도 모르게 포르노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으며, 유명인사들로부터 시작된 카메라폰의 공포가 빠르게 선남선녀들에게까지 퍼지고 있다.

셋째, 이차대전 직후 당시로서는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오웰도 개인화된 디지털 정보기술이 보편적으로 이용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 결과 오세아니아에서 대중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지만 오늘날에는 국민과 소비자가 국가와 기업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

행정기관과 기업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물론이고 시민단체 사이트, 안티사이트 등의 게시판에는 국민과 소비자의 의견이 수시로 올라온다. 또한 서울시에서 시작된 민원처리온라인공개시스템은 중앙부처로 확산되고 있으며, 나아가 유엔을 통해 전세계에 보급될 예정이다. 요즈음 공무원들은 마치 투명한 벽으로 둘러싸인 사무실에서 일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미래사회에 대한 예언으로서 ‘1984년’의 우울한 전망이 지닌 한계를 확인하며 우리는 다소간 안도감을 느낀다. 오늘날 Big Brother에 의해서든 little sisters에 의해서든 프라이버시는 위기에 놓여 있지만, 사이버공간에서 전개되는 정보주체의 역동적인 활동을 보면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정보통신기술이 약속하는 온갖 편리의 향유에 프라이버시라는 제물은 필연적인가? 정보화에 앞서가는 나라들이 모두 이 문제를 풀기위해 고심 중이다. 지금까지 나온 최선의 해답은 정보주체를 역사의 현장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정보주체가 자기정보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보장을 해주어야 한다. 최근 NEIS 논쟁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도 그러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음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미래 예측은 늘 틀리게 마련이다. 누구라고 무덤 속에 편히 잠든 오웰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인간에 내재한 전체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고 프라이버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오웰은 분명 시대를 앞서 갔고 ‘1984년’은 기념비적 저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공헌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굳이 그의 잘못을 확인함은 이제 와서 그의 업적에 생채기를 내려는 것이 아니라 정보사회의 진실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이다. (윤영민, 2003년 KISDI 웹사이트 전문가 칼럼 기고문)

2084년 human 로봇

2084년에는 인간형 로봇이 존재한다.
100년전부터 사용된 텔레스크린은 장소의 제약으로 인해 점차 철거되었고, 더욱 강화된 감시시스템을 위해 인간형 로봇이 개발되었다.
이 인간형로봇은 human 로봇이라 불리는데 생김새(피부조직)는 인간과 같지만 내부는 로봇이다. 인간을 감시하는 것. 어떻게 보면 빅브라더가 도처에 있는것이다. 이 로봇은 진짜인간과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서로를 믿지못한다.

human 로봇은 인간이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존재한다. 진리부, 평화부, 애정부, 풍부부, 심지어 프롤 계급까지도 퍼져있다.

이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사회에서, 스미스는 이 로봇을 통제하는 프로그램을 없애는 반역을 하기위해 오브라이언과 조직을 꾸리지만, 오브라이언은 human 로봇이었고, 결국 스미스는 증발한다.

I Love You




2010년 3월 9일 화요일

2084년:사랑과 사교육

1984년에는 반(反)쾌락주의였다면 2084년은 언제 어디서든지 어느누구와도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세계다. <2분증오>대신 <2분사랑>이 있고, 당원들끼리의 결혼이 제한되어 있었던 법은, 당원들끼리 결혼을 할 수 있게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아이는 모두 당원의 중책을 맡기위해 공공기관에 맡기는 것은 1984년과 다를게 없다. 하지만 쾌락주의의 결과물로 아이들의 비율은 늘어나고 공공기관에 맡길 수 있는 아이들은 엘리트 아이들로 한정되어있다. 엘리트 아이들로 못뽑힌 아이들은 고아가 되었다.
엘리트 아이를 육성하기 위해 아이를 낳기 5개월 전부터 부모들은 태아교육을 시키고 이런 태아교육을 시키는 전문가들도 나타나게 된다. 옛 사상경찰들은 불법인 태아교육을 시켜주는 전문가들을 잡게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세아니아의 사회적 특성

오세아니아의 사회적특성을 알아보면서,

스미스가 저항한 이유에대해 생각해보자.



첫번째 특성.

감시사회. (지독한,)



두번째 특성.

전체주의.

(전체주의와 감시사회는 다른거죠.

전체주의는 개인이 국가를 위해존재한다는것.

개인이 없는것. 전체만 있다는것. 집단주의

집단의 일부로서만 가치가 있는 개인.

개인은 없다. 자유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



세번째 특성.

철저한 계급사회.

(오브라이언은 내부당원, 스미스는 외부당원, 사회의 85%를 차지하고있는것은 프롤)



네번째 특성.

증오에 기반한사회.

(전쟁. 정말 전쟁을 하고있나?

가장 인상적인것이 '2분증오',

증오하는 마음을 만든다.)



다섯번째 특성.

반쾌락주의 사회.

(스미스와 줄리아가 만나서하는것. 격렬한 정사.

하지만 그 정사를 어떡게 생각하는가 ? 그것자체가 저항.

왜? 사랑하는것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정치에 있어서 스포츠와 섹스는 아주 좋은 도구.

이 사회는 성적으로 금욕주의 적인 사회.

섹슈얼퓨리터니즘, 성적엄숙주의. 즉, 반쾌락적인 사회.

결혼은, 섹스는 무엇을 위해서 하는가,

안하면 최선이고, 하더라도 오직그것은 당에 봉사하는 사람을 낳기 위해서..

하지만 섹스를 하지않아도 애는 인공수정으로 낳아지고,

아이는 공공기관에서 길러진다.)



이정도되면 사람들은 저항하고 싶을텐데, 저항할 수 없다.

왜?

무지와 철저한감시.

프롤이 가장 자유롭다. 어차피 무지하기 때문에 그 자유를 저항하는데 쓰지않는다.

당원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하게 감시한다.

1984년의 줄거리

배경?

가상적인 시대. 미래를 1984년으로 (그 시대에서는 미래, 반세기정도의 미래)설정.

작가가 반세기정도의 미래를 기록했다는것은 대단한 일이에요.

그리고 또 반세기가 지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있잖아요. 대단하지 않아요?

주인공?

윈스턴스미스. 한사람인가? 줄리아도있어요.

스미스는 뭐하는사람인가? 진리부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과거를 날조하고 있죠. 허허.

뭘위해서? 당을위해서.

줄리아는 뭐하는 사람인가? 진리부소속.

오브라이언은 어디소속이지? 스미스의 상사. 진리부 장관격.


그런데, 무슨일이 벌어졌지?

줄리아가 스미스에게 사랑한다고 했어요.

왜?? 어떤이유로? 나이도많고, 병도있는데.. 왜?

스미스가 당을 배신했어요.

빅브라더입장에서는 그렇지만, 우리가 객관적으로볼때는 저항이라고 볼수 있지. 저항.

왜, 저항을 했을까? 어떤정당이지?

영국 사회당.

스미스가 왜 저항했을까? 정말 이책에서 중요한 부분이에요.

빅브라더가 싫어서요

역사를 지워서요

글쎄.. 어떤부분이 못마땅했을까?

('오세아니아의 사회적특성' 을 생각해본후.)


자, 이런사회에서 스미스는 왜 저항했을까.

역사를 왜곡하고, 가정도 순탄하지 못했다.

첫번째 부인은 일주일에 한번씩 당의 새로운 사람을 배출하기 위해 성관계를 요구했다.

이 사회에 대해 분노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자그마한 저항의 도구로 '기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일기장을 구입했다.

그러다가 같은 진리부에 근무하는 줄리아를 만난다.

처음엔 줄리아가 자기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사상경찰로 오해한다.

그러다가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그런 저항에는 관심이 없다.

줄리아는 많은 남자들하고 관계를 해봤기 때문에 진실을 알고있다.

반쾌락주의를 외치는 사회의 모순을 알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당에 따르는것 같으나 최대한 들키지 않으면서 관계를 맺고있다.

들키지 않을거라고 믿고있다.

그런데, 스미스는 거기서 만족할 수 없다.

뭔가 더 의미있는 행위를 하길 원한다.

그래서 오브라이언을 눈여겨 보게 된다.

오브라이언은 스미스를 집으로 부른다.

줄리아를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그것이 파국으로 가게 한다.


결국 마지막에는 '사상범'으로 검거가 된다.

검거 되고 나서 바로 항복하는가?

아니, 스미스가 제일 싫어하는 쥐로 고문을 하고 나서야 항복하게된다.

줄리아는 일치감치 항복한듯..

스미스는 결국 완전 항복하고 모든것을 놓게된다.

완전한 자유는 '2+2=4'라고 맘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

2+2은 몇인가? 답은.. 당에게 달려있다.

자신이 배운사실과 다른 사실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순.

스미스는 모든것을 놓고 항복한뒤 죽음을 맞이한다.

무제


2084년...
소설이 쓰인 시기(1948년와 달리, 현재에도 그렇고 2084년엔 더 다양한 형태와 기능을 가진 기기들(휴대폰, 컴퓨터 등)이 생겨난다.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과 같은 감시체계는 일반인들이 아니라 범죄자나 국가 보안을 주목표로 해서 설치될 것이다. 각 국가들은 사회의 안정을 추구한다. 하지만 때때로 범죄자가 아닌 일반인을 감시하는 일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정부와 사람들의 관계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계층이 나뉘어서 각각의 계층에 맞는 일에 종사하는 사회가 된다.( 1984년의 내부당원이나 외부당원 같이.)
그리고 표면적인 큰 전쟁보다는 국가기밀을 유출하려는 활동이 더많아지고 각종 질병에 대한 치료약의 공급난을 겪는다. 새로운 병이 생기고 그 병의 치료약을 개발한 나라에서 높은 개런티를 요구하거나 그것을 어떤 특권처럼 이용하기도 한다.
또한 치료약 못지 않게 식량부족 현상도 생긴다. 지구 온난화등으로 생태계가 변하면서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이 축소되어 작물들을 수입하려는 나라가 많아지는 한편, 인공작물 재배를 하는 곳도 생겨나서 자체적으로 작물을 생산할 수 없는 나라들에 높은 가격을 요구한다.(지금의 석유같은 지하자원과 비슷한 힘을 지닐듯)
1984년과 같이 온갖 기계에 둘러쌓여 감시받는 삶보다는 오히려 국가는 국민들을 위해 노력하며, 그를 위해 국가간의 소리없는 전쟁이 치열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수진>

무제


소설에서의 텔레스크린은 공산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빅 브라더’의 과학적 도구였다고 이해했다.
<2084년>을 개작한다면 나는 두 부분을 바꾸고 싶다.

1. <1984년>에서는 공산주의 체제를 다루는데 이는 오늘날에 이미 실패한 체제로 평가되므로 <2084년>에서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오늘날의 보편적 가치)의 체제 유지를 다루고 싶다.

2. 도구 부분을 개작하고 싶다. <1984년>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2분간 증오’라는 일종의 세뇌 프로그램이다.
그 시대의 설정으로는 매우 흥미롭고 정신개조에 적절한 것일지 모르지만 <2084년>에서는 억지스러운 구성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유비쿼터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바꾸고 싶다.
모든 생활 속의 기기들은 유비쿼터스를 통해 이어져있으므로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체제 유지를 위한 은근한 매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2084년>에서 윈스턴은 '유비쿼터스'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부분에 대해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데 이것을 범죄로 치부하고 범죄의 단속과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존속을 위해 묵살한다면 이야기가 새롭게 진행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원은란>

자유 아닌 자유

1984년. 초강대국 오세아니아에는 빅 브러더라는 반 신격화된 독재자가 왕 노릇을 하고, 사람들은 텔레스크린 이라는 판옵티콘 형식의 감시체제로 인해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한다. 그리고 지속적인 언론 조작과 신어 사용을 통해 사상을 통제한다. 결국 사람들은 이 세계의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만약 알게 된다하더라도 아무것도 행동하지 못한 체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고 거짓 정보에 몸을 맡겨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2084년엔 이것과는 조금은 다른 세상이 올 것이다. 인류의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지만 사회는 그에 따라가지 못해 도덕성이 결여된 사회 지체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다양하고 치밀한 범죄나 참혹한 사건 사고의 발생이 잦아져 감시망은 더 광범위하고 세분화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고, 마치 히키코모리와 같이 무한개인주의라는 의식을 머리에 박고 살아갈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자본주의는 더욱 심화되어 빈부격차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따라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다양한 이념과 사상들이 등장하여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를 연상시킬 만한 사회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정구현>

Telebot 2084

원작에서와는 다르게 텔레스크린이라는 고정된 물체대신 telebot이라고 불리는 로봇이 항상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설정으로 하고싶다. 텔레스크린보다 더욱 심한 이 감시는 주인공이 혼자 있을 공간조차 없게 그리고 스미스와 줄리아는 서로 만날 수 없고, (항상 로봇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단지 인터넷을 통해 서로의 존재만 파악할 수 있게하고 싶다. 그리고 원작보다 더욱 감시가 심해지는 설정으로 하고싶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성에서 감시하는 설정으로, 스미스와 줄리아는 인터넷을 통해 서로를 알게되고 그 중간에 오브라이언이 대화에 끼어드는 설정으로 하고싶다. 스미스는 온갖 감시에도 자신만의 컴퓨터로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자신의 생각을 적어나가고, 줄리아는 그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설정으로 하고싶다. 원작에선 자세히 나오지 않는 형제단도 자세히 나왔으면 좋겠다. 형제단이 스미스와 줄리아에게 접근하고 그들에게 많은 정보를 나누어 주고 '당'의 체제를 어떻게 하면 붕괴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는 내용으로 했으면 좋겠다. 원작에서는 '당'을 붕괴시킬 방법을 노동자 층에서 찾지만 그들이 아닌 당 내외부 사람들이 주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스미스와 비슷한 직위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해결하는 방법으로 (즉, 지식인들이 주축이 됬으면 좋겠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개인의 힘이 너무나 나약하게 묘사되었는데 2084년에는 인터넷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 덕분에 그와 비슷한 위치의 사람들이 그의 생각에 동조해서 '당'이 무너지는 쪽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브라이언도 나중에 그의 생각에 동조하게 되어서 같이 '당'을 물리치는 설정으로 되었음 좋겠습니다.
제 생각은 2084년 미래에 개인의 영향력은 더 커져서 당의 의한 정보통제나 압박이 불가능해 질거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한 사람의 생각이 여러사람에게 급속도로 퍼지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미래사회에는 그 파급력이 더 커질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성진>

2010년 3월 8일 월요일

2084년에는... ...

2084년의 30년 전, 지구의 이상기온과 여러 가지 자연재해로 지구가 어지러웠었고 인류는 이를 새로운 로봇과 여러 기기의 발전으로 이겨냈다. 인류는 이 시기 전에 행동했던 환경을 파괴하는 행동들을 반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즉, 소설 1984에는 전쟁이 인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2084년에는 자연재해가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또한, 2084년에는 인류들이 이렇게 환경에 신경을 쓰는 사이 인간들은 나약해 지고 있었다. 지식들이 모두 기기에 있었기 때문에 머리를 쓸 필요가 없었고, 힘을 쓰는 일은 전부 로봇이 하였고, 인간이 하는 일은 단지 그 기계가 고장 나지 않았나 하는 것을 보는 일이였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이렇게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 1984년에는 보이는 계층이 존재 하였다면 2084년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였는데 상위계층들은 고급 정보를 다루는 일들을 하거나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기기를 고치거나 계발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정보를 이용해서 평범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선동하는 역할 또한 한다. 즉, 소설 1984에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2084에는 그 사실조차 모른 채 사람들이 살아갈 것이다.

자본독재와 전자감시

자본독재와 전자감시

<1984년>은 소련이 해체되기 전, 스탈린 체제의 소련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소설이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20세기를 풍미했던 공산주의 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 맞서 승리를 거두웠다. <2084년>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일어나는 개인에 대한 감시와 독재에 대한 소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84년, 세계는 같은 공용어와 화폐를 쓰는 거대한 연방국가가 통치하고 있다. 이 사회의 국민 각각은 사회등록번호와 유전자 정보가 담겨있고 신분증 역할을 하는 하나의 모바일 폰을 할당받는다. 국가기관은 국민 하나하나의 위치와 통화내역을 감시할 수 있다. 이 사회에선 개인의 정치적 발언에 의해 비밀경찰에 끌려가거나 어느날 증발하는 일은 없다. 다만 일자리를 잃고 사회적 공공재(치안, 의료, 통신 등)을 이용할 권한을 박탈당할 뿐이다. 이 사회에서 노동자나 신체기관, 혹은 투표권까지 모든 물건은 거래가 가능하다. 사회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의회는 투표권을 다량으로 사들인 소수의 부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의 활동은 제한된다. 현금이 폐지되고 모든 수입과 지출, 거래는 기록에 남는다.

이 사회에서 개인의 사적 활동은 전자기기에 의해 심하게 감시당하고 있다. 개인의 모든 거래내역과 위치, 통화내역은 물론, 패킷감청을 통해 인터넷 사용까지 감시받는다. 모든 종류의 사회활동에서 신분증명을 의해 항상 13자리의 사회등록번호를 요구받는다. 특히, 전과자에게 전자발찌 착용을 의무화하여 그들의 위치와 대화 등을 국가기관에서 상시 확인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신분조회가 불가능한 사람은 외딴 수용소에 무기한 감금해 심문한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은 현대에 들어서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텍스트로 읽히기도 하지만, 오웰은 죽을 때까지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전체주의에 대해 생리적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파시즘을 비판하며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1984년>의 주인공은 결국 전체주의적 사회에 굴복하고 소설은 비관적으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일기를 통해 오세아니아 사회를 고발하던 윈스턴은(그리고 오웰은) <2084년>에는 더 나은 사회가 도래하기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2084년>을 평범한 사람, 프롤들의 승리로 끝맺고 싶다. <정구영>

감시가 완전한 자유를 낳고, 정보기술이 인간에게 무한한 능력을 제공한다


2084년 세상 모든 곳이 다 보인다.
개인주택은 그저 편의시설일 뿐이고, 거리는 그저 교통상의 차이밖에 없을 뿐이다.
그렇기때문에 각자 개인의 집을 아예 다 열어놓고 산다.(어짜피 다 보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사생활이란 없다. 모든것이 다 이웃과 세계인들이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옛기록에 따르면 감시기술로 인해 사생활 침해가 온다니 말이 많았고, 심지어는 빅브라더의 시대가 온다라면서 온갖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투쟁했던 학자도 있었다지만, 전부 다 쓸데없는 투쟁이었을 뿐이다. (필자: 빅브라더를 우려하던 학자 어르신께 정말 미안하군요.^^)

이미 사람들은 개인주의가 뭔지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공동체주의가 발달하였고, 이러한 세상이기에,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회적인식에 따라서, "사생활"이라는 단어는 아무의미없는 단어일 뿐이었다.

세상 모든 곳이 다 보이는 것!

이 것은 삶의 평화, 삶의 자유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은밀한 곳을 아무리 찾으려해도, 산 깊숙한 곳, 울창한 숲 심지어 깊은 바다조차 사람들에게 안보이는 곳은 이 세상에서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밀한 범죄는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단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형벌을 각오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한편, 이런 각오의 범죄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미 정보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무한하게 소통하며, 그 결과 인간들은 점차 선한마음이 발달하여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형벌을 각오한자, 인생을 포기한자, 정보격차로 인해 소외된자...이들을 모두 구제하며 "정상인간"으로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감시망과 정보기술의 발달을 보고서, 한때는 파시즘적 독재를 꿈꾸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모두 감시행위를 하다가, 감시하려던 사람들과 쌍방향적 소통을 통해서 결국 많은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전달받고, 결국 그들도 독재할 생각을 접고는 그들도 역시 "정상인간"이 된다.
이렇기 때문에 결국 정보기술의 발달과 감시망의 확대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김진희>

2084년의 감시사회

2084년의 오세아니아 사회는 모든 계층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것이다. 절대권력 계층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아 ‘예외’의 상황을 만들만한 일말의 가능성까지 없애고 싶어 하는데 고도로 발달한 정보사회에서는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국민의 치안을 명목으로 모든 장소의 감시망시스템을 설치함으로써 개인은 그 어디에서도 감시망에 대한 의식 없이 행동할 수 없게 된다.
또한 핸드폰은 감시 시스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일정나이가 되면 당에서는 감시기능을 탑재한 핸드폰을 무상 지급하고 모든 장소에서 24시간 강제소지 할 것을 법으로 정하는데 이는 국민을 위한 것처럼 선전하지만 사실 개인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위한 것이다. 핸드폰은 한명의 사상경찰을 국민 개개인에게 붙힌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당이 국민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영역은 여전히 생각이다. 하지만 당은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감시시스템에 익숙해진 터라 당에 반동적인 말이나 행동을 일삼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게 되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당의 목적대로 획일화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점점 무미건조함을 넘어서 기계와 다름없는 반사적이고 수동적인 상태가 되어간다.
하지만 스미스처럼 과거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당에 반동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 자신들 내면의 생각을 당에 들키지 않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강구해 내려한다. -서유진-

죄수 감시 100년의 역사

1984년의 죄수감시는 텔레스크린을 이용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100년후인 2084년에는 텔레스크린과는 비교도 안될 감시기능이 나올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죄수가 말을 할 때마다 목에서 진동을 느끼게 한다던지, 움직일 때마다 몸에 전기가 흘러 찌릿찌릿한 느낌을 받는다던지 다소 잔인할지도 모르지만 더욱 과학적인 방법들이 나올 것 입니다. 그래서 2084년이라는 소설로 각색할 때, 수용소에 죄수들에게 목에 풀어지지 않는 전자충격목걸이를 채우고 팔과 다리에도 풀리지 않는 전자충격 팔찌,발찌를 채워서 100년전에 죄수가 움직일때마다 일일이 말해줘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탈피하여 죄수 스스로가 다시 그 행동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수용소 내에 장교들이 있는데 100년후인 2084년엔 죄를 지은 죄수를 감시하는 데 괜한 노동력을 쓰지 않고 장교로봇을 만들어서 죄수이동 시스템, 죄수고문 시스템을 입력시켜서 죄수들을 고문하는 데 이용하는 걸로 각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환구>

무제

만약 내가 <1984년>을 <2084년>으로 개작한다면 계층사회에 대한 내용이 있는 부분을 추가로 덧붙이고 싶다. 1984년 산업사회와는 다르게 현대 사회는 정보사회이고 2084년이 되면 발전된 정보사회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급정보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상류층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해 여러 방법을 이용함으로서 정보를 얻을 것이고, 하류층 사람들은 정보를 얻을만한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정보의 수집방법으로 인해서 계층들 간 정보격차도 커질 것이고 여기에서 사람들의 경제적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에서 또한 계층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만약 소설을 개작한다면 이 부분을 추가로 넣고 싶다. <오세현>

2084년, 스미스는 죽지 않았다

현재 정보기술발달 상황으로 볼 때, 2084년에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기술이 발달할 것이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넘어선 정보화기기가 사회를 더 넓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개인을 옭아맨다. 핸드폰이나 인터넷의 발달로 개인을 감시하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이고 국가에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이름의 부서가 24시간 내내 전 국민을 감시한다(가령, 평화부?). 하지만 1984년과 다른 형태로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자신이 감시 당하고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개인마다 작은 칩이 내장되어 있어서 그 사람의 생각까지 지배할 수 있을 뿐.
그러나 그런 사회에도 스미스 같은 사람은 있다. 어느 날 문득 (칩의 오류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이런 사회에 의문을 가지며 개인의 자유를 원하는.. 2084년에도 역시 그런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종이에 반감을 표현하는 글 하나를 쓰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컴퓨터 따위는 더 이상 자신만의 세상이 아니므로.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내가 쓰는 <2084년>에는 스미스 한사람의 생각이 사회를 바꾸는 씨앗이 될 수 있길 바란다. <김지현>

1984년과 다른 2084년

1984년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개인감시가 철저하게 되어있다. 당원들은 거의 하루24시간을 정부의 감시 속에 살아간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1984년을 2084년으로 바꿔 쓸 수 있다면 감시 체제를 바꾸고 싶다. 1984에서 처럼 정부의 감시를 받게 된다면 2084년에는 그 감시에 대한 조작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텔레스크린을 통해 정부에서 보게 되는 화면을 개인이 다른 화면으로 전환 시켜 정부가 착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만약 1984년에서 처럼 사람들이 정부의 감시 속에서 살아간다면 2084년에는 그 감시를 피해 사람이 사람다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끔 만들고 싶다.

감정의 통제로 생각의 말살을...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송수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으로 감시한다. 구어(영어)를 기본으로 한 신어를 만들고, 해마다 단어의 수를 줄여감으로써 표현력과 생각의 영역마저 줄인다. 나는 생각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2084년, 사람 들은 감시카메라, 미디어기기등으로 사생활을 감시당한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이유가 되는 감정마저 통제한다. 모든 사람들에겐 하루에 한 알씩의 알약이 지급된다. 이 약은 사람의 감정을 완벽하게 없애고, 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도록 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하루하루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삶을 살게되고, 희로애락마저 사라져버리는 기계가 되어간다. 그러나 주인공은 아내의 죽음이후 몰래 약투약을 하지 않게되고, 감정에 눈을 뜨게된다. 그리고 당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 그와 같은 사람들의 모임인 혁명단에 가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 혁명단을 이끌어 당을 붕괴시키고 혁명에 성공한다.
저는 감정과 생각이라는 초점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와 비슷한 영화가 한편있습니다. ‘이퀄리브리엄’이라는 작품입니다. 예전에 인상깊게 보았는데, 이번에 [1984]를 읽게되면서 상당부분 비슷해서 이퀄리브리엄의 모티브를 가져와봤습니다.

"기억 성형" 을 통한 반 기계적 인간.

미래를 상상하며 쓴 [1984]속에서 (당시에는 꿈에 가까웠던) 인간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술이 등장하지만 현재에 대부분 개발되어 구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1984로부터 100년 후인 “2084”는 어떤 모습일까?

윈스턴 스미스는 “당이 과거의 기록을 고치고 삭제해도 사실은 기억 속에 존재 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2084]에선 기억세포의 변형, 소위 ‘기억성형’ 통해 기억도 송두리째 바꾸거나 없애버린다. 또한 뇌 속에 내장된 "칩"을 통해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당에 전송되어 영상으로 재생된다. 이렇게 되니 사각지대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24시간동안 감출 수 있는 것은 없다. 이제 모든 태아는 철저한 유전자 획일화로 당의 사상에 규합한 인간, 즉 사상죄란 꿈조차 꿀 수 없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물론 사상범이란 단어조차 신어사전에서 삭제 될 것이다.

인간에 대한 구속은 [1984]에 비해 훨씬 강압적이지만 사람들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반항할 수 없는 절대 독재의 출현

1984년에서는 보통 텔레스크린이나 사상경찰을 통해 사람들을 감시하고 억압했지만 그것이 2084년으로 바뀐다면 보다 더 무서운 세상으로 도래하게 될것이다. 현재에도 보통 사람들은 휴대폰을 사용하지만 앞으로는 화상 통화와 같은 기술들이 더 진보하여 모든 핸드폰에 자신을 볼 수 있는 카메라가 장착되있을 것이다.(지금도 대부분 휴대폰들이 그러하지만)그러면 사람들이 휴대폰을 사용하는 동시에 모든사람들은 전화국과 정부로 통해 그들의 대화나 신상정보 그리고 GPS와 같은 기능으로 장소까지 쉽게 노출될 것이다. 100년 전에는 없던 휴대전화의 기능 또한 텔레스크린보다 더욱 큰 간섭의 작용을 할 것이다. 만약에 그런 독재와 당에 대해 반하는 세력들은 서로간의 소통과 대화가 더욱이 단절되고 어쩌면 그런 반동세력들은 혼자서 테러를 하거나 은밀한 장소에 지령을 담어두는 등 여러 행위를 할 수있다. 하지만 그것도 2084년도의 기술진보로 인해 무효화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실시간으로 그들을 감시하는 위성들, 그리고 땅에는 모든 선들이 한곳으로 이어져 있어 휴대폰이 없더라도 언제나 자신이 감시당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반동세력자체가 불가능해지고 사람들은 점점 더 기계적이고 어쩌면 1984년보다 더욱 억압적인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치명적인 유비쿼터스시대가 도래한다.

1984에서 세계는 이중사고, 사상경찰, 기억 말살로 대변되는 정치적인 전체주의와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 대변되는 고도의 기술주의가 병존하는 사회였지만 2084년은 정보 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한 치명적인 유비쿼터스 시대로 표현 하고 싶다. 겉으로는 정치적인 통제가 사라졌다고 한편으로 볼 수 있으나 이는 더욱 무서운 기술주의의 병폐로 나타나는데 국가가 각 개인을 감시하기도 하지만 기업이나 집단 그리고 생활 속 유비쿼터스화로 인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환경의 편리함 속에서 인류는 24시간 감시당하는 생활 속 리틀 브라더들이 비약적으로 많아진 것이다. 1984에서 당은 20세기 중반 소위 사유 재산 폐지를 실시 극소수인 상층부 당원들의 부를 축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2084년에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 자본주의 적인 성격을 나타내지만 실제적으로는 사유재산을 축적한 지위 그리고 양의 따라 신분을 나누어 사유재산을 많이 소유한 사람일수록 더욱 세상으로부터 감시를 받는 사회가 온 것이다.

개인 감시의 시대가 온다

1984년보다 20년 이상이 지난 지금, 전체주의와 수많은 독재체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계속 성장했고 첨단기술로 인한 인간들의 사고영역은 넓어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비관적인 입장에서 구상해본 2084년은 국가의 감시체계가 아닌, 개인의 감시와 그로 인한 사활 침해에 관련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예를 들면, 첨단 장치를 이용하여 개인을 교묘히 감시하는 고지능 파파라치와 스토커들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면 제일먼저 집안의 천장과 창틀, 그리고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어보며 첨단 감시장치를 떼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더 나아가면, 은밀한 감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개인은 철저한 보안을 요구할 것이고 과학자들은 그들의 요구에 맞춰 더욱 더 강력한 감시장치를 만들어, 감시의 악순환을 유발할 것이다. 또한 이 속에서 기계독점이나 감시 장치의 밀거래 현상도 나타나, 국가가 제지할 수 없는 지하 경제가 형성되는 내용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김잔듸>

수업 관련 영화 Enemy of the State 강추


학생 여러분, 아마도 여러분 대부분은 'Enemy of The State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라는 영화를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보지 않았다면 이번 기회에 보도록 하세요. 매우 정보사회학적 영화입니다. 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 글래디에이터, 델마와 루이스, 블랙 호크 다운 등 문제작을 감독한 리들리 스콧의 동생인 토니 스콧이 감독한 영화입니다. 윌 스미스와 진해크만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격을 벌입니다. GPS를 이용한 실시간 감시체제가 무엇인지를 실감있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2010년 3월 7일 일요일

아직 저자 등록을 못한 학생들에게

모든 학생들에게 다시 저자초청 메일을 보냈습니다. 가급적 빨리 등록을 마쳐주기 바랍니다. 그래야 첫 과제를 성공적으로 게시할 수 있습니다. 저자등록을 할 때는 꼭 실명으로 하기 바랍니다. 어차피 여러분은 과제를 실명으로 올려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불편을 줄여줄 것입니다. 혹시 저자 등록이 어려운 학생들은 내게 메일을 보내주기 바랍니다. 이 포스트에 코멘트를 달아도 좋습니다.

과제

내가 <2084>라는 SF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1984>에서 프롤(일반 대중들)들이 원하지 않고 감시를 당했던 부분을 그것이 하나의 쾌락이 되어 스스로 즐기게 된다고 바꾸겠다. 그리고 빅브러더 또한 대중들에 의해 직접 선출되어 지배하는 내용으로 바꾸고 싶다. 그에 따라 텔레스크린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스미스와 달리 텔레스크린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마치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 처럼 그들 스스로가 감시를 원하기 때문에 아무도 권력에서 벗어나거나 대항할 생각 따위를 하지 않는 설정을 하겠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스미스 말고 줄리아를 실천적인 인물로 그려내고 싶다. 항상 영웅이 남성인 것을 새롭게 하고 싶어서 이기도 하고, 남성들은 물론이고 여성들에게도 신선한 경고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1984>의 결말은 결국 스미스와 줄리아 모두 빅브러더에게 굴복된 모습이지만 <2084>에서는 둘 모두 그런 위기상황에 놓이지만 역시 줄리아만은 결코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채로 희망을 주는 결말을 만들고 싶다. 사실 대중들이 감시받는 것을 쾌락으로 느낀다는 설정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풍자 소설로 그려내고 싶은 의도다. 그러한 무비판적이고 무상한 때가 오기 전에 모두가 분발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쪽으로 이끌어 내고 싶다. 얼마 전 미네르바 사건이 <1984>를 읽으면서 떠오르면서 몸서리쳐질 정도로 소름끼쳤다. 사실 아직 무엇부터 내딛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계기를 통해 무언가 만약이라도 이러한 경우를 막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함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