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보호를 위한 정책 연구
국가인권위원회 2004년도 연구용역사업의 최종보고서를 제출합니다
2004. 9
연구책임자
윤영민(한양대학교 정보사회학과 교수)
연구자
김현석(한양대학교 연구교수)
고동현(연세대 강사)
최 홍(한양대학교 대학원)
류자현(한양대학교 대학원)
한 양 대 학 교
1. 서 론: 네트워크사회와 프라이버시
1) 사회적 쟁점으로서의 프라이버시
우리나라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정보 혹은 프라이버시 보호만큼 새로운 사회적 쟁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도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낯선 쟁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라이버시 침해가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 왜 프라이버시를 다른 사회적 가치를 포기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개인정보 혹은 프라이버시 보호에 대해서는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할 것이다’라는 식의 미래가정법으로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고, 최근에야 겨우 몇몇 구체적인 피해 사례들을 가지고 논쟁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공공부문에서는 아직도 개인정보보호가 예방적 성격의 입법이나 정책이다. 민간부문과 달리 개인정보의 유출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생활 혹은 이름도 낯선 프라이버시가 자유, 민주, 정의만큼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가치라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우리사회는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강조하는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대화를 통해 개인주의가 충분히 개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라이버시에 대한 주장들은 이념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지 못했다. 아직 어떤 이론가도 그것이 목숨을 바칠 만큼 중요한 가치임을 입증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이나 운동가들이 그것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을 뿐 큰 사회적 반향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이유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제약이 늘 시민들이나 소비자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보상과 함께 제시된다는 점이다. 국가안보, 생명과 재산의 안전, 효율성, 국가경쟁력, 편의성 등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가치가 프라이버시의 제약에 대한 보상으로 거론된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선택은 항상 혼란스럽다.
이 때문에 프라이버시에 관한 입법이나 정책 추진에 있어 강력한 사회적 지지나 정치적 동력을 끌어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정보 혹은 프라이버시 보호에 관해 시급히 국가적 입장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당분간 프라이버시는 갈수록 뜨거운 사회적 쟁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전자주민카드, 전자건강보험증, NEIS 등 정보화 국책사업을 둘러싸고 우리사회는 적지 않은 혼란을 경험하였으며, 그에 따른 거액의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였다.
정부는 유비퀴터스 컴퓨팅을 우리 경제의 차세대 성장엔진 중 하나로 선택하여 적극적으로 관련 사업들을 추진하고자 한다. 그런데, 스마트카드, 무선 인터넷, LBS, RFID, IP v.6 등 유비퀴터스 컴퓨팅에 적용되는 정보기술 중 어느 하나 프라이버시 문제를 내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전자정부사업도 계속 프라이버시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현 단계에서 전자정부사업들은 거의 모두 부처간 정보공유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국민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보화는 심각한 장벽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2) 프라이버시의 역사성
한 사회에 있어 프라이버시 개념은 대체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다.
19세기말 명사들의 스캔들 보도에 경쟁적이었던 황색저널리즘은 ‘홀로 있을 권리’라는 고전적 의미의 프라이버시 개념을 등장시켰다. 대중매체의 보도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사적 영역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탄생한 것이다.
근대적 우편제도가 시작된 19세기 중엽부터 통신의 비밀이 법적 권리로 등장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전화가 널리 보급되고 도·감청이 증가하면서 프라이버시 개념은 통신의 비밀까지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그러나, 대중매체나 전화까지만 해도 아직 프라이버시는 유명한 정치인, 연예인, 혹은 운동선수가 아닌 보통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권리로 인식되지 않았다.
컴퓨터가 통신에 널리 활용되고 대규모의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원격접속이 가능해짐에 따라 개인정보의 보호가 프라이버시 개념에 추가되었으며, 비로소 프라이버시는 대중적 관심사로 발전하였다.
디지털 정보기술에 의존한 대규모 데이터베이스의 등장은 개인정보의 가치를 높여주었다. 사실 보통사람의 개인정보는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 교환가치가 거의 없으며, 데이터베이스에 집적되었을 때 비로소 상업적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첫째, 개인정보는 대량으로 처리되는 정보의 일부가 되었을 때 가치를 갖는다. 예컨대 정크메일을 발송하는데 사용되려면 많은 사람들의 주소가 담긴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며, 개인주소는 그 데이터베이스의 일부가 되었을 때 상업적 가치를 갖게 된다.
둘째, 행정이나 금융 업무가 데이터베이스로 관리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 은행구좌번호, 신용카드번호 등과 같은 개인정보의 유출이 정보주체에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만약 행정이나 금융 업무가 수작업으로 처리되고 민원서비스가 대면적(對面的)으로 수행된다면 주민등록번호나 은행구좌번호가 남에게 알려진다고 해도 정보주체에 피해가 돌아가 가능성은 아주 적을 것이다.
사실 보통사람들에게 있어 프라이버시는 정보사회에 진입하면서 비로소 관심사가 되었다. 정보화는 개인정보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개인정보 혹은 프라이버시 침해를 사회적 쟁점으로 끌어올렸다. 혹자는 정보화가 프라이버시 침해를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반쪽의 진실이다. 프라이버시 침해를 논하기 이전에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만한 가치로 격상시킨 것이 바로 정보화이기 때문이다.
정보화는 프라이버시를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확장시켰다. 최근에 프라이버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 프라이버시는 원하지 않은 접근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말한다. 이는 ‘홀로 있을 권리’라는 고전적 의미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신체나 공간에 대한 물리적 접근을 의미할 뿐 아니라 전자우편, 메시징, SMS 등과 같은 전자적 접근도 포함한다. 다시 말해 주민이나 소비자가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을 통한 타인의 접근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 프라이버시는 자신에 관한 정보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용되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본인의 동의 없이 혹은 법적 근거 없이 개인정보가 수집, 보유, 매매, 이전, 노출, 매칭 등이 되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셋째, 프라이버시는 자신이 정확하고 올바르게 표현될 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데이터베이스의 소유자나 관리자는 그곳에 담긴 개인정보의 무결성(integrity)을 유지해야할 의무가 있으며, 정보주체는 데이터베이스에 들어있는 자신의 정보를 열람하고 정정하거나 정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넷째, 프라이버시는 자신의 정보가 지닌 가치에 대해 보상받을 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상업적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할 때는 각 정보주체에게 어떤 형태로든 적절히 보상해야 함을 가리킨다.
다섯째, 보다 포괄적 관점에서 프라이버시는 정보주체의 자기정보 통제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프라이버시는 개인정보의 수집에서부터 보관, 관리, 이용, 이전, 그리고 폐기에 이르기까지 개인에 관한 정보가 사회적으로 활용되는 모든 과정과 방식에 관해 개인정보에 관한 정보주체의 권리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라는 의미로 확대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프라이버시가 개인이 자신의 어떤 정보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수집되고, 어떻게 보관되며, 어떻게 이용되는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적 변화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경향은 프라이버시 보호에 관한 담론에서 정보주체라는 존재가 확실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정보주체가 정보소유자로부터 구분되고 정보주체의 권리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데이터베이스가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정보소유자와 정보주체의 구분이 사실상 불필요했다. 개인정보의 오ㆍ남용이란 연예인이나 정치인과 같은 사회적 저명인사의 사생활 폭로가 대부분이었고 따라서 그 피해도 대체로 그들에게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일반대중의 개인정보를 담고 있고 그것의 상업적 활용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정보주체를 정부, 기업, 혹은 단체 등 데이터베이스 소유자로부터 구분해서 그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어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보기술의 발달이 가져오는 프라이버시의 개념적 변화가 여기서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정보화가 궁극적으로 프라이버시가 전제하는 개인(individual)에 대한 관념 자체를 바꿀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서양문명에서 개인에 대한 관념 혹은 개인주의는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 시대에 최초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근대성(modernity)의 핵심적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자신이 자신의 행동과 삶, 나아가 운명에 대해 성찰하고 책임져야하는 존재라는 인식, 사회 속에서 살아가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혼자이며 고독한 존재라는 인식, 인간은 사물과 현상을 객관적 가치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존재라는 인식, 그리고 나(Self)와 타자(Others) 사이의 분명한 구분은 근대성을 이전의 문명과 구분 짓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은 근대의 산물이다.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개인은 가족, 부족, 혹은 지역사회와 같은 전통적 공동체의 일부로서만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며, 개인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아니라 그 개인의 재능, 성격, 행동, 그리고 업적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 된 것이다.
정보화로 인한 개인정보의 가치 증식은 이러한 근대적 개인의 문화와 만남으로서 프라이버시 문제로 부상된다. 만약 정보화로 인해 근대적 개인이 어떤 다른 존재나 존재인식에 의해 대체된다면 프라이버시는 개념적으로 어떻게 변화될까?
이러한 인식변화를 요구하는 기술적 발전이나 조직적 변화가 이미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데 프라이버시에 대한 논의, 나아가 프라이버시에 대한 입법과 정책 수립의 진정한 어려움이 있다.
여러 연구가 지적했듯이 최근까지 인터넷 확산은 개인화(individualization) 혹은 개인주의를 촉진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인터넷으로 인해 개인 자체와 개인이 지닌 가치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역량이 크게 강화되었다. 인터넷은 개인이 더 이상 전통적인 사회적 굴레에 억매일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사이버공간에서 개인은 자신의 선호와 기호에 따라 수없이 많은 가상공동체에 가입해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사이버공간은 극도로 세분화되어 사람들은 아주 미세한 관심사, 취미, 기호 등으로 형성된 가상공동체에서 기능적 욕구를 충족한다. 이렇게 해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했던 기존의 사회적 범주들(예: 성별, 인종, 계층)이 힘을 잃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떤 학자들은 정보화가 개인의 승리 그리고 근대의 완성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반전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최근에는 컴퓨터 네트워크의 발달이 그와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역사를 구동시킬 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등장하고 있다.
Douglas Rushkoff(2004)는 인터넷이나 이동전화를 통해 항상 네트워크에 접속되어 있게 되면 더 이상 개인은 자신의 축적된 능력과 업적의 총합이 아닐 것이라고 예상한다. 또한 그는 물건이든 돈이든 데이터든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가 큰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더 이상 희소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네트워크사회에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 네트워킹하고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는 네트워크사회에서 궁극적으로 개인성(individuality)이라는 생각 자체가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고 예상한다.
정보기술의 발전이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신경계와 컴퓨터네트워크가 직접 연결되는 사이보그(cyborg) 사회가 출현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공두뇌학자 Kevin Warwick(워릭, 2004)은 2050년경이면 모든 의사소통이 인간의 신경계가 직접 네트워크에 연결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따라서 말과 언어-따라서 전화도-가 불필요하게 될 것으로 예측한다. 그는 하나의 물리적 개체로서의 개인은 희미한 존재가 되고 대신에 네트워크 상에서 집단적 개인이나 새로운 인격체가 출현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러한 상상을 먼 미래의 일이라고 치부할 것인가?
실제로 최근의 기술적 혹은 사회적 변화를 보면 이미 우리는 그러한 네트워크사회에 깊숙이 진입해 있으며 개인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동전화의 발달, 무선통신기술과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 그리고 그러한 기술발달에 힘입은 사회조직의 변형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전자정부는 전통적인 의미의 부서(혹은 부처)간의 경계를 넘어선 ‘정보의 공유’를 요구하고 있으며, 통상적 의미의 기업간 경계를 넘어선 네트워크기업(혹은 가상기업)이 출현하여 민간영역에서도 ‘정보의 공유’가 ‘정보의 소유’ 문화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는 프라이버시 영역에서 문화지체(cultural lag) 현상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라이버시에 관한 한 유엔인권헌장 정도로 간주되는 프라이버시에 관한 OECD 가이드라인은 25년 전 정보사회의 초입에 제시된 구상이다. 1980년 이후에 일어난 엄청난 기술적 그리고 사회적 변화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지닌 현실적합성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Waters, 2000).
그런데, 현실은 그 가이드라인을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있으며, 그것의 사회적 적합성을 따지는 논의는 거의 전무하다. 그것이 의사-이념적(擬似-理念的) 갈등 형태를 띠면서 논점이 수면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 낡은 가이드라인마저도 이제야 우리나라의 입법과 정책에 제대로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적어도 거기에 포함된 개념들이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프라이버시의 사회적 특성
대부분의 다른 권리도 그렇지만 프라이버시는 특히 다른 권리나 가치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프라이버시가 포괄적인 가치이면서 도구적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부터 프라이버시는 언론의 자유 혹은 독자들의 알권리와 충돌하였다. 명사들의 사생활 보호를 강조하면 기자와 언론에 주어지는 보도의 자유가 위축된다. 그래서 언론에 있어 프라이버시 보호는 보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였다.
프라이버시 보호는 국가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수사기관의 법집행을 위한 요구와 충돌하기도 한다. 9.11 사건이후 미국의 공항에서는 지문과 같은 생체인식시스템을 이용해 외국인의 출입국을 관리하고 탑승자 모두에게 대단히 엄격한 검색-다른 때 같았으면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고소를 당했을 정도로 엄격한 조사-를 받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유럽위원회와 유럽의회는 회원국들이 이동전화, SMS, 전화, 팩스, 전자우편, 채팅, 인터넷 등을 통해 발생하는 모든 통신자료의 보관을 의무화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테러리즘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한 조치라고 하지만 그것은 프라이버시를 위축시킬 수 있는 선택이었다(Laurant and PI, 2003).
또한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는 암호키의 위탁관리 문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수사기관들은 마약, 테러, 납치 등의 범죄를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수사하기 위해서 암호키의 위탁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프라이버시 보호를 우선시하는 학자와 전문가들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서는 국민들이 암호키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강제적인 키위탁은 어떤 경우에도 수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Waters, 2001).
지난 8월 지리산의 조난객이 신속하게 구조되지 못하여 생명을 잃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통신비밀보호법의 엄격한 운용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에 119(소방방재청)가 통신 사업자에게 이동전화 위치정보을 요청하였지만 통신비밀보호법을 근거로 협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정보통신부는 사전에 서비스 가입자의 동의가 있는 경우 119와 같은 긴급구조기관에게는 이동전화 위치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디지털타임스, 04/09/24).
이상에서 보듯이 프라이버시와 다른 가치와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한편으로 테러리스트로부터 국가안보는 물론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를 제한받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프라이버시가 철저히 보호되어야 개인의 생명과 재산이 보호될 수 있다. 신용카드번호, 위치정보, 유전자정보 등은 물론이고 주민등록번호나 이동전화번호도 개인의 생명이나 재산을 위협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프라이버시는 어느 경우에도 보호되어야할 절대적인 가치로 간주되지 않는다. 실제로 프라이버시는 다른 가치와 충돌할 경우 양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PLPR(Privacy Law and Policy Reporter)의 부편집자인 Nigel Waters(2000)는 개인적 수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라이버시에 대해 다소 정신분열증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대부분은 평소에 프라이버시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공중보건, 포르노그래피, 어린이 성추행, 납세사기 등과 같은 쟁점에 관해서는 프라이버시에 관한 평소의 입장을 쉽게 유보한다. 그래서 예컨대 청소년 성범죄자들에 대해서는 신상을 공개하는 사회적 처벌이 허용된다.
이렇듯이 프라이버시는 대단히 상황 의존적이기 때문에 프라이버시 보호는 정보주체의 개인적 선택과 결정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개인적 선택은 프라이버시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답이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선택’은 실현되지 않고, 실현되더라도 형식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개인정보는 관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고 또 다수의 사람들은 몇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개인정보관리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불법적으로 수집한 신용카드번호를 가지고 온라인 쇼핑을 하여 카드가입자에게 손해를 입힌 사건, 노숙자들의 개인정보를 도용해서 휴대폰 가입을 하고 그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만든 사건 등이 보여주듯이 프라이버시 침해는 누구에게나 심각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다수의 사람들은 개인정보를 관리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상에서 논의한 프라이버시의 사회적 성격으로 볼 때 결국 프라이버시 보호란 프라이버시와 서로 충돌하는 다른 공익(혹은 사익) 사이의 균형을 찾는 일이 될 것이다.
4) 바람직한 입법 및 정책 수립 방향
우리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이상의 검토로부터 다음과 같은 입법 및 정책수립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법안과 정책에는,
○ 무엇보다도 개인정보가 정보주체로서 개인의 소중한 자산임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할 가치라는 점이 반영되어야 한다.
○ 개인정보에 대한 궁극적인 권리가 정보주체에게 귀속됨이 반영되어야 한다.
○ 정보주체에게 풍부한 혜택이 돌아가는 한 정보공유를 적극 허용하되,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의 소유자인 기업이나 기관의 데이터베이스 관리가 정보주체의 권익에 반하지 않도록 적절한 규제가 포함되어야 한다.
프라이버시는 공공부문에서는 하나의 시민적 권리로서 이해될 수 있으나, 민간부문에서는 소비자의 권익(rights and interests)으로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국가는,
○ 공공부문의 경우 개인정보가 시민에 대한 국가기관의 감시(surveillance)와 억압에 이용되지 않도록 각 기관의 개인정보관리에 대한 감시(monitoring)와 규제를 철저히 시행한다. 그것은 정보주체, 곧 시민의 대표가 참여하는 민주적 절차여야 한다.
○ 민간부문의 경우 개인정보가 정보소유자에 의해 정보주체(대부분 소비자를 가리킨다)의 권익에 반하여 이용되지 않도록 기업이나 기관의 개인정보관리를 적절히 규제한다. 이에는 정부기관에 의한 규제 뿐 아니라 정보주체, 소비자단체, 사업자단체 등이 참여하는 자율규제도 포함된다.
○ 정보주체의 자기정보관리 능력을 높여주어야 한다. 즉, 정보주체의 자기정보결정권이 이념적 구호에 끝나지 않고 실제로 구현될 수 있는 PMS(Privacy Management System)와 같은 개념의 기술 개발을 적극 촉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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